# 옛모습 그대로의 흙길로 되돌아가는 중…월정사 전나무숲길
그 길로 걸어들어가는 이의 뒷모습을 보자면,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간다’는 표현이 떠오르리라. 진초록의 장대한 숲으로 빨려들어가는 길. 그 길이 바로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이다. 월정사 본전 앞까지 빽빽히 늘어선 1700여 그루의 전나무들은 길게는 370살의 나이를 가진 것들이다. 장대한 나무들은 오랜 나이에도 어찌나 푸르고 건강한지, 그저 그 숲을 걷는 것만으로도 그 싱그러움에 전염되는 듯한 기분이다. 이 숲길의 중간쯤에는 지난 2006년 10월 쓰러진 나무둥치가 있다. 숲길에서 가장 오랜 나이의 전나무였다는데 그 크기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위용이 대단하다.
이렇듯 아름다운 숲길이 아쉽게도 오는 9월말까지 출입이 통제된다. 지난 1994년 전나무 숲길을 황토와 마사토에 시멘트를 섞어 포장하는 바람에 뿌리가 호흡을 못하고, 유기물을 흡수하지 못해 그동안 62그루의 전나무가 말라 죽어버렸다. 저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숨을 쉬며, 건강하게 이뤄낸 숲을 더 편리하게 누려보겠다는 욕심이 그만 나무를 죽이고 만 것이다.
이에 다급해진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급기야 지난 23일부터 시멘트를 다 걷어내고 마사토와 황토를 섞어 예전의 흙길로 되돌려놓는 작업을 시작했다. 늘 얻는 교훈이지만, 자연이란 ‘그대로 두는 것’만큼 최선의 상태는 없다. 왜 우리들은 이런 단순한 상식을 꼭 나무들이 쓰러지고 난 뒤에야 알게 되는 걸까.
여름을 떠나보내고, 가을을 맞는 이즈음에 전나무 숲길의 정취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한 달쯤 뒤 시멘트 포장이 다 걷히면 예전의 순정한 흙길을 다시 밟을 수 있으리라. 그때는 이 길을 밟는 촉감은 예전보다 더 폭신해질 것이고, 전나무 숲이 뿜어내는 향기도 더욱 짙어지겠다.
# 오대산 짙은 숲에 들고자 한다면…오대산 북대사길.
오대산의 숲은 월정사로 드는 길에만 있지 않다. 문을 닫아건 전나무 숲길의 정취가 아쉽거든, 오대산의 깊은 숲으로 드는 길을 찾으면 된다. 상원사 주차장에서 시작해 홍천군 내면 명개리에 닿는 길. 엄연히 446번이란 지방도 번호가 부여돼 있지만, 이 길은 도로번호보다는 ‘오대산 북대사 길’이란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오대산에는 말그대로 오대(五臺)가 있다. 자장율사가 오대산 자락에 전망이 좋은 평평한 대지의 가운데에는 중대를 놓고, 동서남북 방위에 따라 동대, 서대, 남대, 북대를 정해 각각에 암자를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다섯 암자가 동대 관음암, 서대 수정암, 남대 지장암, 북대 미륵암, 그리고 중대 사자암이다. 각각의 암자는 모시는 불상도 다르고 읽는 경전도 다르다. 동대는 관음을, 서대는 미타를, 남대는 지장을, 북대는 석가를, 중대는 문수를 불상으로 모신다. 북대사길이란 바로 북대에 있는 절(寺)집인 미륵암을 지나 두로봉과 비로봉 사이의 낮은 목을 관통하는 길이다. 오대산을 갈라 넘어 간 길은 설악산의 남쪽 자락인 점봉산 아래까지 닿는다.
이 길에는 눈길을 확 휘어잡을 만한 절경은 없다. 온통 숲으로 막혀 조망도 썩 좋다고 할 수 없다. 오대산에서 등산을 하겠다면야 서대암을 지나 비로봉 쪽으로 오르는 코스나 동피골 야영장 위쪽에서 계곡을 건너 동대산까지 오르는 코스가 더 낫다.
그러나 등산이 아닌 부드럽고 유순한 ‘걷기’에 몰두하고 싶다면, 북대사길 만한 곳이 없다. 이 길이 매력적인 것은, 온전한 흙길의 거친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분비나무, 사스레나무, 거제수를 위시한 울창한 숲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즈음이면 그 귀하다는 금강초롱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길가 가까운 곳에서 흔전만전 피어난다.
북대사길은 거리가 만만치 않다. 상원사 주차장에서부터 길이 끝나는 홍천군 명계까지 18km나 된다. 이 길을 걷자면 족히 하루꼬박 걸린다. 이 길은 차로도 넘을 수 있다. 길이 거칠어서 승용차라면 좀 어렵겠지만, 사륜구동 차량이라면 덜컹거리며 넘어갈 수 있다.
# 여덟개 글자를 다 찾아낼 수 있을까…흥정계곡 팔석정
평창에는 맑디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흥정계곡이 있다. 이 계곡을 끼고 펜션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고, 해마다 휴가철이면 피서객들은 상류 쪽의 차디찬 계곡물에 몸을 담근다. 하지만 흥정계곡의 최고 명소라는 팔석정은 정작 아는 이가 드물다.
‘팔석정(八石亭)’이라면 고개를 빼고 정자부터 찾겠지만, 한석봉, 안평대군과 함께 조선조때 당대의 3대 명필로 꼽히던 양사언이 강원부사 재직시절 8개 바위에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강원도부사 재직시절 양사언은 이곳을 자주 찾았단다. 그러다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못 볼 것이 애석했던지 바위마다 제각기 이름을 붙여놓았다.
양사언은 세 개의 바위에다 중국 전설에 나오는 신이 깃들어 사는 삼신산의 세 이름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를 하나씩 가져다 붙였고, 네 곳의 바위에는 석대투간(石臺投竿), 석지청련(石池靑蓮), 석실한수(石室閑睡), 석평위기(石坪圍棋), 석요도약(石搖跳躍)이라 이름을 지었다. 석대투간이란 ‘낚시대 던지기 좋은 바위’, 석지청련이란 ‘푸른 연꽃이 피는 돌로 만든 연못’, 석실한수란 ‘낮잠 자기 좋은 바위’, 석평위기는 ‘바둑 두기 좋은 바위’, 석요도약이란 ‘뛰어오르기 좋은 바위’란 뜻이다. 낚시를 던지거나, 연꽃을 감상하고, 낮잠을 자고, 바둑을 두고, 바위에 뛰어오른다니 한마디로 ‘풍류를 즐기기 좋은 곳’이란 뜻이겠다.
사실 팔석정은 멀리서 보면 바위 위로 운치있게 솟아오른 소나무 몇그루를 제외하곤 별 볼 것 없는 평범한 경치다. 먼발치서 실망하고 돌아설 수도 있겠다. 그러나 팔석정 안으로 들어 물가에 들면 풍경은 거짓말처럼 달라진다. 보는 각도에 따라 수많은 바위들이 마치 빼어난 수석처럼 멋스럽다. 바위를 굽이쳐 흘러내리는 옥빛의 물색도 이리 아름다울 수 없다. 이곳에서는 바위를 뒤져가며 양사언의 글귀를 하나 하나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 예년보다는 못하다지만…벌개미취가 꽃이불을 펼치다.
평창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피어나는 꽃이다. 이즈음 볼 수 있는 꽃은 벌개미취다. 월정사 인근 도암면 병내리의 한국자생식물원에는 지금 보라색 벌개미취가 꽃이불을 펼쳐놓은 듯 화려하게 피어있다.
식물원 관계자는 “예년에 비해 강원도 지역에 궂은날이 많아 꽃이 작년만큼은 못하다”고 했지만, 식물원 안쪽 깊숙한 능선에 펼쳐진 벌개미취 꽃밭은 탄성을 지르게 하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직 60% 정도만 핀 것이 이 정도라니 이달 말쯤이면 아예 꽃사태가 나겠다. 식물원에는 벌개미취 말고도 좀개미취며 산수국, 털부처꽃을 비롯해 갖가지 꽃들이 앞을 다퉈 화려하게 피어났다.
평창군 봉평면 일대는 이른 가을부터 메밀꽃으로 하얗게 덮인다. 메밀의 생육기간은 2∼3개월로 짧은 편. 메밀의 개화시기는 7월부터 10월까지로 파종 시기에 따라 메밀의 개화시기가 달라진다. 봉평면 일대에는 봄 메밀을 심어 7월쯤 꽃을 본 뒤 수확을 하지 않고 8월 중순쯤 다 베어내고는, 다시 가을 메밀을 심어 9월 초순 ‘효석 문화제’ 기간에 맞춰 꽃을 피워낸다.
올해 효석문화제는 오는 9월6일부터 15일까지 펼쳐진다. 축제가 코앞에 다가왔다고 해서 지금 꽃을 기대하고 봉평을 찾으면 실망한다. 이제 새로 자란 메밀싹은 싹이 한 뼘 정도 올라온 정도. 이렇듯 작은 싹이 언제 꽃을 틔울까 걱정스럽지만, 가을볕에 쑥쑥 자라 불과 열흘쯤 뒤에 축제에 맞춰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다. 흐드러진 메밀꽃 아래서 이효석의 생가며, 소설‘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를 찾아가는 여정은 가을의 느낌과 참 잘어울린다.
평창·홍천=글·사진 박경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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