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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산 군립공원 [鳳鳴山郡立公園 사천] : 지도,정상석 사진,산행코스

박상규 2009. 8. 14.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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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산군립공원[鳳鳴山郡立公園 570m] : 경남 사천시 곤양면, 곤명면

봉명산(570m)은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곤양면 무고리와 접하고 있으며, 1983년 11월 14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정상에 이르면 남쪽으로 금오산(金熬山:849m)과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서쪽으로 백운산(白雲山:1,279m), 북서쪽으로 지리산(智異山:1,915m)과 웅석봉(熊石峰:1,099m)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시야가 넓다. 산 아랫부분에는 시루떡을 닮은 3개의 바위가 서 있는데, 제일 위쪽 바위에는 통일신라 때 새겨진 이명산 마애석조여래좌상(경남유형문화재 136)이 있다. 그 밖에 511년(신라 지증왕 12)에 창건된 다솔사(多率寺)와 다솔사 보안암석굴(경남유형문화재 39), 사천 용산리사지(경남기념물 178), 이맹굴(理盲窟) 등 많은 문화유적이 있다. 숲이 울창하고 자연 경관이 뛰어나 삼림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봉명산 자락에 숨어 있는 다솔사는 다섯개의 멋진 밭을 갖고 있다. 솔밭, 차밭, 대밭, 그리고 항상 일렁이는 바람밭, 마지막으로 다솔사를 찾은 그대 가슴에 안겨주는 생애 대한 그리움의 밭이다.

바람 하나 불지 않는 날에도 다솔사에 오면 울울 창창한 노송 숲에서 수많은 솔잎이 정갈히 빗질한 청랭한 바람을 어김없이 그대 가슴에 일렁이는 여인의 머릿결로 안겨준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어 삭막하니 무슨 재미로 살아 가느냐며 한탄하는 그대 휑하니 척박한 가슴밭에도 고요함과 다정함의 씨를 한 점 두 점 다독이며 심어 주는 것이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한 천 오백년의 고찰로 도선국사가 중창한 유서 깊은 절이다. 1748년(영조2년)에 세운 대양루는 맞배지붕 중층 누각으로 대단한 규모이며 한때 쓰러질 듯 기운 것을 근래에 바로 세워 놓았다. 응진전, 극락전과 함께 모두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솔사는 독립운동가이며 녹차를 대중에게 전개시킨 효당 최범술 스님이 거처했던 곳이다. 특히 효당과 원화 보살의 운명적 만남은 당시 굉장한 화제를 낳았다. 효당에게 다도와 녹차 만드는 법을 전수받아 원화 보살이 만든 반야차는 맛과 향, 질에서 뛰어나 현재도 다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다솔사에는 오래된 다구가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또한 다솔사 샘물은 맛이 좋아 진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 길러 온다. 다솔사에서 보면 봉명산은 경주의 왕릉이나 다소곳한 뒷동산 아니면 여인의 유방마냥 봉곳이 솟아 정감이 든다.

등산로는 절 왼쪽 옆으로 널따랗게 잘 다듬어진 오솔길이다. 다솔사에서 보안암으로 빠지는 고개를 통과해 20분이면 정상에 선다. 정상에는 정자를 지어 놓고 군데 군데 의자도 만들어서 솔바람 소리와 향기에 취해 휴식하기 더없이 좋다.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서면 2m 넓이의 잘 닦여진 산책로가 곧장 나타나고 보안암까지 20분이면 간다. 다솔사 뒤의 고개에서 봉명산 정상을 가지 않고 곧장 보안암까지는 산책하기 좋은 평탄한 반 시간 길이다. 보안암은 80년대 초에 제2석굴암이 발견되었다고 신문에서 떠들썩하게 보도한 적이 있다. 널따란 판석을 쌓아 석굴을 만들어 그 안에 마애불을 모셔 놓았다. 토함산 석굴암을 본떠 만들었는데 크기와 형태 모두 석굴암에 미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축조한 중요한 석굴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평상시에는 석굴은 안으로 잠가 놓아 석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전등을 갖고 가서 비치면 석불을 볼 수 있다.

보안암에서 좌우 능선으로 조그만 산길이 나 있다. 암자에서 뒷봉우리까지는 10분이면 되고, 봉우리에서 서쪽 이명산을 오르는 깨사리고개까지는 10분 더 가면 된다. 깨사리고개는 지도상에 도로가 뚫린 것으로 나와 있으나 실제 북천쪽에서 고개까지 2차선 포장도로가 나 있고 남쪽 진교의 백토골로는 도로가 나있지 않다. 깨사리고개에서 이명산 정상까지는 아주 잘 나 있는 30분 정도의 숲길이 이어진다. 정상에는 원래 용지라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가뭄이 심할 때면 이곳에서 항상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상에서 사방이 툭 트인 조망은 일품이다. 남으로 금오산과 다도해가, 서쪽으로 백운산, 서북으로 장대한 지리능선, 북으로 황매산, 서남으로 와룡산, 동북으로 자굴산이 에워싸 산첩첩 물첩첩이다. 이명산은 정상 아래 등산로에 시루떡을 꼭 닮은 바위가 셋이 있고 제일 위의 시루떡 바위에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정상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이쪽으로 200m 오다 두 갈래 길에서 남쪽의 보다 뚜렷한 산길을 택해야 한다.정상에서 마애불상까지는 15분이면 된다. 마애불 머리 위에는 벌집이 달려 있어 주의해야 한다. 이곳은 샘이 있고 제단이 마련되어 있어 심심치 않게 기도객이 와서 치성드리는 장소로 소문나 있다.마애석불은 경남 유형문화재 136호다.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에서 곧장 능선 아래로 내려 오면 작은 고개인데 곧장 북으로 뻗은 능선을 20분 오르면 계명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동북으로 20분 내려서면 계산 마을이고 이곳에서 북천역까지는 지척이다.  이명산은 일명 이맹산이라 하지만 용이 울었다 하여 용명산이라 하며 봉명산, 계명산과 함께 삼명산이라 한다. 다솔사에서 시작해 봉명산 - 보안암 - 이명산 - 마애불 - 계명산을 올라 삼명산을 마치고 북천으로 와 차를 타는 것이다.(4시간)

 

사천 봉명산 - 이명산
초가을 산행. 이보다 더 여유로운 여정이 있을까. 고개를 들어보면 쪽빛 하늘이요, 내려보면 누런 들녘. 골 깊은 곳에서는 나뭇잎도 서서히 물들어 간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는 또 어떠한가. 동네 뒷산도 좋고, 이름난 명산도 좋다. 가을을 받아들이는 산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답사산행은 이런 가을이 제격이다. 고즈넉한 풍경소리, 미소를 머금은 마애불, 하늘금을 긋는 팔작지붕…. 추색과 어울리자 산중에 숨었던 문화유산의 향기가 골골이 풍겨나온다.

산행 구간은 ‘사천시 곤양면 신산정류소~다솔사~쉼터 삼거리~봉명산(407봉)~헬기장~쉼터 사거리~삼거리~보안암 석굴~돌무더기~456곒봉~도로~철탑~이명산(570.1곒)~능선 삼거리~이명산 석불좌상~삼거리 고개~한솔수련원~하동군 북천면 산촌마을’로 이어진다. 산행시간은 4시간30분~5시간 가량.

곤양에서 옥동행 버스를 타고가다 다솔사 앞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리면 도로 건너 신산마을 표지석이 보인다. 표지석과 신산버스정류소 사이 샛길로 들어선다. 효자비를 지나면 용산마을 표지석이 있는 삼거리다. 왼쪽 길로 100여곒 걸어가면 다솔사로 가는 2차선 도로에 닿는다. 방장휴게소 식당을 뒤로 하고 산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5분여 올라가면 산행안내판이 있는 주차장에 닿는다. 이를 지나면 다솔사의 자랑인 솔숲길이 1㎞가량 이어진다.

다솔사에는 대웅전인 ‘적멸보궁’이 볼거리다. 이곳에는 부처가 열반에 들기 전의 모습으로 누워 있다. 와불 뒷면 벽에는 유리창을 통해 사리탑이 비친다. 지난 7월 대양루의 북에 우담바라가 폈다고 해 화제가 됐다. 적멸보궁과 마주보는 대양루는 다솔사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이곳에는 망원렌즈가 설치돼 있어 사람들이 우담바라를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대양루에서 되돌아 나와 오른쪽 해우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삼거리 임도에서 오른쪽 오르막으로 산불감시 초소가 보인다. 이곳이 산행의 들머리다.

산길은 너르고 편안하다. 10분 정도 오르면 벤치가 설치돼 있는 산중 쉼터다. 쉼터와 임도 사이에 샛길이 있다. 제법 비탈진 오르막길이다. 샛길을 30분 정도 오르면 봉명산 정상에 이른다. 정상 바로 아래에서 정자를 짓고 있다. 멧부리를 지나 내리막 산길을 따라간다. 다시 길이 넓어지는가 싶더니 헬기장이다. 50여곒 지나면 쉼터가 마련돼 있는 십자로 사거리다. 첫번째 쉼터에서 임도를 따라갔다면 봉명산 정상을 에돌아 이 사거리와 만나게 된다. 왼쪽으로 ‘천년고찰 보안암’을 알리는 현수막이 있다. 이를 따라 10여분 들어가면 보안암에 닿는다. 미소 띤 석조여래좌상과 16나한상이 봉안돼 있는 석굴을 들여다 보노라면 석굴암이 떠오른다.

보안암에서 되돌아 나와 다시 삼거리로 간다. 왼쪽으로 꺾어 원래의 산길을 따른다. 길섶을 따라 오롯이 세워진 6기의 돌무더기(케른)와 김해 김씨묘를 지나 100곒쯤 가면 중요지점이다. 이곳에서 너른 임도를 버리고 왼쪽 오솔길로 파고 들어야 한다. 잡목을 헤쳐가며 15분 가량 비탈을 오르면 삼거리다.
야트막한 456봉에 오른 직후 오른쪽으로 꺾으면 내리받이 길이 시작된다. 10분 가량 내려오면 2차선 도로를 만난다. 이곳은 사천시 곤양면과 하동군 북천면을 가르는 경계다. 도로를 건너 맞은편 임도로 올라선다. 150여곒 올라 모롱이를 돌면 오른쪽 비탈로 산길이 이어진다. 철탑을 지나면 임도다. 임도에 오르자마자 오른쪽을 주의해서 보자. 옅은 산길이 슬그머니 숲속으로 들어간다. 지금부터 땀깨나 흘릴 구간이다. 40분 정도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이명산(570.1m)정상에 닿을 수 있다. 억새가 지천인 이명산 정상은 뛰어난 조망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와룡산 금호산을 머금은 삼천포 앞바다의 풍광은 가히 절경이다. 북쪽으로는 지리산 주능선도 보인다.
  
하산길은 서쪽이다. 외길이므로 가던 길을 그대로 가면 된다. 좌우로 뚫린 조망을 즐기며 250곒가량 내려오면 갈래길이다. 뚜렷한 길은 오른쪽. 이 길을 따라 그대로 떨어진다. 15분 가량 내려오면 깜짝 놀랄 볼거리를 만난다. 이명산 마애석조여래좌상(경남 유형문화재 136호)이 산중턱 암벽에 새겨져 있다. 얼굴은 돋을새김인 양각으로, 목 아래는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마애불의 둥그런 얼굴과 가는 눈, 살며시 다문 입은 앞서 보았던 보안암 석불의 미소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마애불을 지나면 시루떡 모양의 두개의 바위를 잇따라 만난다. 5분 정도만 더 내려오면 십자형 사거리다. 고개인 이곳에서는 오른쪽 내리막길로 꺾어야 한다. 10여분이면 한솔 청소년수련원을 지나 도로에 닿는다. 버스를 탈 수 있는 하동~진주 2번국도까지는 40분이면 충분하다.

 

○ 다솔사 - 봉명산 - 보안암 - 이명산 - 마애불 - 계명산 - 계산마을 1. 용산리 다솔사 → 정상(30분)
2. 무고리만점 → 보안암 → 정상(30분)
3. 초량리 → 서봉암 → 정상(80분)

 

소나무와 차밭의 시린 기운에 헐떡이는 마음을 잠재우다

송도(松濤). 글자 그대로 새기면 소나무가 일으키는 물결이라는 말이겠는데, 실은 소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를 일컫습니다. 차인(茶人)들은 찻물 끓는 소리를 표현할 때 이 말을 씁니다. 솔바람 소리는 달리 송뢰(松?賴)라고도 합니다. 퉁소 소리도 이와 흡사하다는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퉁소 소리에는 소리의 근원인 바람의 원형질이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송도든 송뢰든 솔바람 소리를 일컫기는 한데, 찻물 끓는 소리와 퉁소 소리간의 유사성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말의 공통적 속성은 그 말을 만든, 혹은 쓰는 사람들의 의지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일상에서 우리는 자연스럽다는 말을 어색하지 않거나 꾸미지 않은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순일(純一), 무잡(無雜), 무사(無邪)의 의미로도 씁니다.

 

엄마 젖에 주린 아이가 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상대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이 우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는,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금방 아니라는 결론에 닿습니다. 자연은 어떠한 경우든 스스로 상처받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바람이 솔가지를 꺾고 눈이 소나무의 허리를 동강내어도 바람과 소나무, 눈과 소나무는 상처를 주고받은 일이 없습니다. 사람이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고 우는 것은 그 원인이 심리적인 것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자연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자존심과 사회적 불평등 관계가 개입돼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이 폐기되지 않는 한―이 말을 한 프로타고라스가 소피스트를 자칭한 최초의 사람이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인간사의 비극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 민족, 국가마다 다른 자[尺]를 갖고 사니까요. 사람 사이의 다툼, 민족·국가 간의 분쟁이나 전쟁의 원인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까. 인류 역사상 수많았던 인종청소도, 최근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자신들이 가진 자의 정당성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척도는 자연이어야 합니다. 인지와 문명의 발달도 자연을 거스르는 한 비극적 파국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모든 인간이, 자연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는 상태를 자기완성의 궁극처로 삼는 날, 우리는 비로소 ‘평화’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솔바람 소리를 듣고 차맛을 느껴보아야

솔바람 소리를 말하다가 엉뚱한 곳으로 에두르고 말았습니다만, 다솔사(多率寺)에서 솔바람 소리를 듣지 않고 차맛을 느끼지 않으면, 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차인들에게 다솔사는 茶率寺이기도 합니다. 그 내력에 대해 살피기에 앞서 절의 역사부터 간단히 더듬어 보겠습니다.
 
경남 사천시 곤양면의 봉명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다솔사는 511년(신라 지증왕 12)에 연기 조사가 영악사(靈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습니다. 그 후 636년(선덕여왕 5)에 다솔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676년(문무왕 16)에 의상 스님이 영봉사(靈鳳寺)로 고쳤습니다. 이후 신라 말에 도선 스님이 중건하면서 다시 다솔사라고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솔사라는 절 이름의 내력은 1749년에 중건한 대양루(大陽樓) 중건기에 밝혀져 있습니다. 다솔사가 앉은 자리가 장군대좌혈(將軍大座穴)이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장군의 자리인 만큼 당연히 (군사들을) 많이 거느리고(多率) 있다는 얘깁니다. 다분히 풍수적인 발상인데, 그렇다면 거느린 군사는 쭉쭉 하늘로 뻗은 소나무를 말하는 것이라는 추정은 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예부터 다솔사에는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절로 드는 길 양쪽에 도열하듯 서 있는 80년 안팎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해발 408m에 불과한 봉명산을 아주 깊은 산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람하면서도 적당히 굽은 모양은 노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 소나무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먼 길을 달려온 수고의 몇 배는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이 절을 다(茶)솔사로 연상하게 되는 것은 효당 최범술 스님이 1917년 나이 14세에 이곳으로 출가했기 때문입니다. 이 후 효당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해인사에서 학인으로 공부할 때 서울에서 내려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는 책임을 맡아 대구, 경주, 양산 등지로 배포하였습니다. 이 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만 15세가 되지 않아 석방되었습니다. 일경으로부터 풀려난 효당은 학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한편 재일조선불교청년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1933년 일본 대정대학 불교학과 졸업 직후 귀국한 효당은 조선불교청년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만해 한용운을 따르는 사람들로 결성된 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에 가담, 항일운동을 전개합니다. 이 무렵 다솔사는 국내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이었고, 후견자였습니다. 당시 효당은 만해의 생활까지 책임졌는데, 만해의 회갑 잔치(1939)를 연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김동리의 대표작 ‘등신불’ 소재가 된 절

한편 효당은 1934년부터 다솔사에 초등과정의 광명학원을 세워 인근 농민 자제들을 가르쳤는데, 강의는 소설가 김동리가 주로 맡았다고 합니다. 김동리의 대표 소설인 ‘등신불’은 이렇게 하여 탄생된 것입니다(이상 효당에 관한 얘기는 김광식 선생의 ‘만해와 효당 그리고 다솔사’라는 글에 의존한 것임). 효당이 이곳 다솔사의 차밭을 가꾸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반부터라고 합니다. 예전부터 법당 뒤에 묵은 차밭이 있었는데, 200~300년 된 차나무가 제멋대로 자라는 것을 다듬고, 차 좋다는 절에서 차나무를 구해다 심고 가꾸며 손수 차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1973년에 전통 차 문화를 집대성한 ‘한국의 다도’라는 책을 펴내 한국 다도의 맥을 되살렸습니다. 효당이 이 때 만든 차의 이름은 ‘반야로(般若露)’인데, 아직도 그 후광이 남아 다솔사의 차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반야로(般若露)는 지혜의 이슬이라는 뜻입니다. 차를 마시는 행위가 수양과 관계됨을 알게 하는 이름입니다. 예로부터 차의 이름에 이슬 로(露) 자를 즐겨 붙였습니다. 이는 차나무가 반음(半陰) 반양(半陽)의 상태에서 잘 자라는 특성에서 기인합니다. 차 밭에 큰키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어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로(竹露)니 옥로(玉露)니 하는 애칭들의 탄생 배경입니다. 대나무에 맺힌 이슬을 먹고 자라서 죽로가 되는 식이지요. 지금도 3천여 평에 이르는 다솔사 적멸보궁 뒤 비탈진 차밭에는 군데군데 편백나무가 자라고 있고, 야생의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다솔사는 아담한 규모의 절입니다. 돌계단 위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는 대양루(도유형문화재 제83호)를 지나면 적멸보궁이 석축 위에서 봉황의 날개인 양 팔작지붕을 펼치고 서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는 응진전과 극락전, 그리고 최근 해체 보수를 마친 안심료가 고운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채 다소곳이 앉아 있습니다. 왼쪽에는 승방이 기와를 켜 쌓은 흙담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채로운 점은 주불전인 적멸보궁에 와불을 모시고 있다는 점입니다. 통상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습니다. 부처의 진신이 있는 도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다솔사의 적멸보궁에는 열반상을 모셨을까요?. 본디 다솔사의 주불전은 대웅전이었습니다. 1978년에 대웅전의 삼존불상을 개금할 때 후불탱화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되어 적멸보궁으로 바꾸면서 열반상을 모신 것입니다. 20세기에 조성한 적멸보궁다운 창조적 발상이라 하겠습니다.

 

오른팔을 베개 삼아 모로 누운 열반상을 볼 때마다 나는 웃음이 나옵니다. 산 사람들도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이리 저리 뒹굴다가 열반상의 자세로 잠이 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인도 여행을 하며 열반상을 봤을 때도 경외감보다는 참 편안하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솔사는 열반상이 아니어도 편안한 절입니다. 소나무와 차밭의 시린 기운이 헐떡거리는 마음의 거친 물살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기 때문입니다. [2007.07/ 월간산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ㆍ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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