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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 - 법성포

박상규 2009. 7. 13. 22:12


해는 여기에서 뜬다. 그리고 그가 있는 곳에서도 뜬다. 그가 동해에 해를 보러 간다고 중얼거리던 밤, 서해에 떠오르는 해가 보고 싶었다. 마음 저편을 알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해가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해라면. 그가 7번 국도를 걸어 해에게로 갈 즈음 나는 77번 국도를 걸어 해에게로 가고 있었다. 마음의 길을 찾듯 구불구불한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가자 작고 소박한 마음을 만나듯 영광의 법성포 마을에 닿았다.


바다로 달음질쳐 가기 전에 불갑사(佛甲寺)로 향했다. 주변에 상사화(相思花)가 지천인 절이라는데, 지금쯤엔 어떤 기다림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처럼 남아 있을까. 잎이 나면 꽃이 지고 꽃대가 나오면 잎이 말라버리는, 그래서 늘 그리워해야만 한다는 꽃. 8월에서 10월까지 자주색 꽃이 핀다는 상사화와 꽃무릇은 푸르게 잎을 틔우고 있었다. 얼마나 그리워해야 하기에 모두들 땅 속이나 나무 둥치 속으로 숨어든 겨울, 푸른 얼굴을 내밀고 있는가. 때론 만나지 못해 아름다운 만남도 있다지만 그 낯빛이 너무도 적막해 사천왕문까지 이어지는 고요한 상사화 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그리움이 깊으면 속울음마저도 고요해지는가 보다고. 팔작지붕의 다포계(多包系) 건물인 대웅전이 먼저 보인다. 쌩한 날씨인데도 창살엔 꽃이 피었다. 연화문(蓮花紋), 설발문(雪髮紋), 국화문(菊花紋), 목단문(牧丹紋), 보상화문(寶相華紋)이 차례로 다섯 가지 꽃을 피우고 있는데, 보기 드문 설발문을 여기에서 만난다. 한겨울 눈꽃이 여기 핀 것이다.
 
새로이 채색이 되어 그 맛을 덜어내는데 법당 안에 들어서서 불상 위의 닫집과 벽면의 오래된 불화를 보니 오랜 시간이 느껴진다. 대웅전을 조각한 조각가가 피를 토하며 죽자 그 피가 까치가 되어 날아갔다는 전설이 담긴 불상 뒤의 그림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불상의 방향이다. 대부분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부처님이 앉아 계시기 마련인데 불갑사의 부처님은 건물의 좌측에 앉아 계신다. 영주 부석사에 갔을 때 이런 형태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는데 불갑사의 불상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숨은 가르침이 있을까 싶은데 남방불교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다시 마당에 서서 대웅전을 바라보는데, 까치 한 마리 날아와 뒷산의 참식나무 위에 앉는다. 시선은 까치를 좇다가 지붕의 용마루에 툭 솟은 보주(寶珠)에 닿는다. 일종의 사리탑으로 인도에서 유래된 양식이란다. 불갑사는 인도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 침류왕 1년(384년)에 불교를 전하면서 처음 지은 불법도량이고, 법성포(法聖浦) 또한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을 거쳐 첫발을 디딘 곳이기에 그리 이름 붙였다니 영광 곳곳 인도불교의 자취가 남은 이유를 알겠다.

불갑사를 떠나 바다로 향하는 길엔 작은 마을들을 지나며 미륵불, 당산 할아버지 할머니, 석조불두상을 만난다. 군남면 설매리 서고마을 미륵골에 있는 석조불두상은 바위 위에 불상의 머리만 조각하여 올려놓은 형상이다. 생김은 온화하고 편안해 보이는데 몸체 없이 머리만 따로 있는 것이 의아스럽다.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데 여기에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단다. 잠시 눈을 감아본다. 때론 길을 걷다가 바람에게도 푸득 날아오른 새들의 날갯짓에도 소원을 빌듯, 자주 발걸음 멈추고 마음을 달래던 우리 할머니처럼. 백수읍 지산리 서봉마을에서 고인돌을 만났을 땐 그 곁에 오래도록 앉아 생각했다. 사람들과 바람이 새기고 지우는 세상 모든 무늬에 대해, 세월이 흐를수록 그 위에 겹겹이 쌓이는 수많은 사연들과 소원들에 대해….







염전 사람들은 소금이 ‘온다’고 한다. 그리고 소금꽃이 ‘핀다’고 한다. 바다와 해와 바람이 만들어내는 그 꽃맛은 짜고 달고 쓰고 시다. 그래서 일까, 그들이 소금에 대해 말할 땐 참 귀히 여기듯 느껴진다. 천일염전이 많아 이름 붙은 염산면(鹽山面)에서 을씨년스러운 염전을 만난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다고 해도 해가 짧은 겨울은 소금이 ‘오는’ 때가 아닌 것이다.
 
푸성귀도 과일도 물고기도 다 때가 있듯 소금도 때가 있는 것이다. ‘때’에 따라 밀도가 달라지는 우리의 모든 ‘만남’과 ‘이별’처럼, 영광에서는 많은 인연이 소금처럼 왔다가 파도처럼 밀려갔다. 염산면에선 ‘두우(斗牛)’ ‘야월(野月)’이라는 지명을 만났다. 언젠가 중국 땅에서 북두칠성을 믿는 소수민족을 만났을 때처럼 달과 소를 믿는 이들을 만날 것만 같은 땅 이름, 그들만의 언어를 손짓 발짓으로 나누고 싶어지는 땅이다. 야월리 야장마을 정류소상회 앞에서 볼 붉은 아이들과 마주쳤다. 야월초등학교에 다닌다는 아이들이 달빛 환한 들판의 새들처럼 지저귄다. 까륵까륵 쏟아지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그들만의 언어 같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그들의 말을 귀에 담으며 야월의 오후 햇살을 받는다. 햇살이 촘촘해지는 만큼 아이들과의 만남도 농밀해지는데, 늘 그렇듯 아이들은 새떼처럼 금세 어딘가로 사라진다.

섬과의 만남은 더더욱 쉽지 않다. 하늘은 맑은데 큰 파도가 온 탓에 배가 뜨지 않았다. 늘 육지의 날씨로 바다의 날씨를 가늠할 수는 없다. 섬 여행 때마다 발길은 묶는 바다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다. 참 숭고한 일이다 싶다. 자연의 이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면 내가 한갓 미물임을 오래도록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점점 섬들이 멀리 보이는 두우리 해변에서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거친 파도가 자꾸만 갯벌을 들어올렸다 다시 내려놓는다. 그럴 때마다 하나의 바다 그림이 지워지고 또 하나의 그림이 드러난다. 그 위에 바닷새들도 제 발자국을 찍으며 논다. 물결, 구름, 바람 자꾸만 변하는 바다와 하늘의 표정을 오래도록 본다. 영원히 몰라 좋을 것이다, 바다 저편의 마음은.


짭조름해진 마음으로 설도 포구에 닿았다.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어 있지만 일제시대까지도 이곳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단다. 생김새 때문에 원래는 ‘누운 섬’으로 불렸는데 일본인들이 ‘눈섬’으로 잘못 표기하는 바람에 ‘설도’라 불리게 되었단다. 낡은 목선들이 오가는 아주 작은 포구. 발 들이자마자 갯내가 코에 확 끼쳐드는데 점점 눈이 내리니 이곳이 정말 설도(雪島)구나 싶다. 이곳은 젓갈로 유명하다. 밴댕이젓, 황석어젓, 엽삭젓, 병치젓, 조개젓 등 다양한 젓갈들도 많지만 낙월도 앞바다에서 잡는 새우와 염산의 천일염이 버무려져 곰삭아 내는 새우젓 맛은 전국에서 가장 뛰어나 김장철이면 장사진을 이룬단다. 여전히 젓갈집들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골코름한 맛이 일품이랑께. 곰삭고 곰삭아야 사람도 젓갈도 다 제 맛을 내는 법이여.”
털모자를 뒤집어쓴 아주머니들은 간신히 포장만 친 작은 노점에서 새우, 백합, 망둥어, 꽃게를 판다. 가게 이름은 충남2호, 신성호, 신광호, 금성호, 모두 그 집 남정네들이 직접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작은 통통배 이름이다. 노점 안에 불을 지핀 아주머니들이 몸 녹이고 가라며 손 붙잡는다. 그 손짓만으로도 눈발은 허공에서 녹아 진눈깨비로 떨어진다. 스륵, 얼었던 마음 한켠 풀리는 소리를 듣는 작은 포구에서 아주머니들의 짜디짠 바다 이야기를 듣는다.





하사리로 접어드니 보리밭 푸르다. 찹쌀보리단지 지나자 대파밭 푸르다. 벌써 봄인 듯 논밭이 푸르니 움츠렸던 어깨가 자연스레 펴졌다. 추운 날씨에도 청정한 얼굴을 내미는 것들은 그곳에도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 매콤한 파밭을 맴도는데 아주머니들이 대파 수확에 여념이 없다. 올해는 대파 값이 헐값이란다. 작년에 평당 만오천 원이었던 게 올해는 이천 원이라니 마음 고달플 법해 걱정 어린 말을 건네니 돌아오는 말은 너무도 단단하다.
“괜찮아. 작년에 비쌌응게.”
하늘의 뜻에 따라 땅의 마음에 따라 열매를 맺는 나무들처럼 자연이 주는 만큼만 받으며 사는 이들이다. 그 마음을 접하자 좁았던 마음이 툭 터진다, 두꺼운 대파의 육질이 부러지듯 시원하고 알싸하게. 그러자 대파의 들척지근한 매운 향내가 마음을 두드린다. 아주머니들이 흙을 털고 묶는 한 단의 대파처럼 튼실하게 걸어가자며 마음의 삼거리를 지나 하사리 갯벌로 향한다. 삼거리를 지나자마자 길 가던 남자에게 백합 잡는 곳을 물으니 답이 온다.


“뻘 가시게라? 이 추운디 백합은 왜 잡는다요?”
날 향한 걱정인가 백합을 향한 걱정인가. 추운데 왜 거길 가느냐는 것인지 겨울엔 추워서 1미터쯤 갯벌을 파고 들어가는 백합을 왜 꺼내려 하냐는 것인지. 여하튼 추워서 사람도 백합도 모두 집 안에 꽁꽁 들어앉았단다. 걸망을 끌고 가다 ‘툭’ 하고 걸리면 주워 담는다는 하얀 조개 백합. 그렇게 발길에 마음이 툭 걸린다면 알 수 있을까. 툭 툭 누군가에게 누군가의 마음이 걸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갯벌, 바람이 어깨를 툭 치고 갈 뿐이다.


다시 77번 국도를 타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백수해안도로를 달리며 멀리 점점 칠산도가 떠 있는 바다에 마음을 툭 풀어버리는 저녁, 어느새 하나 둘 불 켜지는 법성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바닷바람 불어치는 고요한 법성포 마을에서 늦은 잠을 청하기로 한다. 내일은 배가 뜰 것인가 꿈결처럼 물을 때, 바다의 말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도 내일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


굴비 마을 법성포의 아침
새벽, 언덕에 올라 법성포 마을을 본다. 하나 둘 가로등 불빛이 꺼지고 정박한 배들이 어둠을 한 꺼풀 벗는다. 굴비 가게 문이 하나 둘 열린다. 밤새 걸개에서 바닷바람에 얼며 마른 굴비들이 아침햇살에 눈을 뜨고 촉촉해진다. 그렇게 서해의 작은 마을은 아침을 맞았다. 새해를 맞았다. 무심결인 듯 수선스럽지 않게, 어제처럼 그리고 내일처럼.

‘어여차 어여차 닻 둘러매고/ 칠산바다에 돈 실러간다/ 어어 어어 어하요/ 궁마궁마궁마/ 어뜬 사람은 팔자가 좋아 부귀로 잘 사는디/ 우리는 어쩌다 보니/ 이놈의 배만 타먹고 산다/ (중략) / 어어 어어 어하요/ 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어라/ 우리 영감님 칠산바다로 돈 실러 나갔다/ 어어 어어 어하요’

법성포의 ‘굴비 노래’다. 법성포 여인네들은 저 먼 수평선만 바라보며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그저 기다려야만 했다, 깊은 바다 밑으로 갔는지 바람에 묻혔는지도 모른 채.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강풍아 불지를 말어라’다.


사내들이 잡아온 조기들은 여인들의 손을 통해 햇볕에 말라가며 짜디짠 기다림과 그리움이 배었으니 진미일 수밖에. 그래서 오늘 아침의 법성포도 은은히 은빛으로 빛나는가. 그러나 올해는 가거도에서 조기를 잡는단다. 칠산 앞 바다에서 잡는 조기가 최상품이었으나 해수가 따뜻해지면서 이젠 가거도로 조기잡이를 나간 배가 보름 만에 법성포항으로 돌아온단다. 이젠 가거도로 돈 실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들이 있어야겠지만, 오늘의 법성포는 작은 굴비 가게들과 함께 소박한 어촌 풍경을 그릴 뿐이다. 여기저기 내걸리는 굴비들의 함성으로 아침을 맞은 법성포, 떡집에선 김이 모락모락 아침 찬 기운을 데우는데 길 건너 삼거리 슈퍼엔 조등(弔燈)이 달렸다. 한 사람이 떠나고 또 한 사람이 찾아오나 보다. 그렇게 법성포 작은 마을에도 한해가 가고 또 한해가 찾아왔다. 오늘은 배가 뜬단다.






계마항에서 하루에 한 번 뜬다는 배를 탔다. 한 시간 반쯤 파도를 타고 간 배는 송이도에 닿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초분(草墳)이 많은 섬, 송이도는 앉은뱅이 초분이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초분은 말 그대로 풀로 만든 무덤이다. 뱃일 간 자식들이 수일씩 안 들어오는 경우가 많은 섬에서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지낼 수 없어 임시로 만드는 가묘다. 또한 음력 정월 같이 추운 때에 죽었을 경우엔 땅을 팔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집안의 여자 중 임신한 사람이 있을 때는 이장을 할 수도 없었단다. 송이도에는 그 초분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5년 전의 초분이 가장 최근에 만든 것이란다. 앉은뱅이 초분을 찾아 나선다. 묘 자리가 안 좋아서 이장을 해야 할 경우 뼈를 차례로 앉혀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길게 누운 초분이 아닌 앉은 꼴의 초분으로 자그마하다. 초분을 보고 있으면 생과 죽음이 친밀하게 느껴진다. 땅 속에 묻히는 것이 아니어서 땅 위에서 산 자와 죽은 자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일까. 초분을 보고 내려오는 언덕에 서서 새하얀 몽돌해수욕장을 내려다본다. 흙길 위로 마을 사람들 오가는 모습도 보인다. 송이도는 반나절만 머물러도 이장, 우체국장, 발전소장, 보건소장을 우연히 마주쳐 얘기 나눌 수 있는, 어디에 서 있어도 바다가 보이는 작고 어여쁜 섬이다. 그래서 모두가 한 가족처럼 친밀하다.


마을길을 한번 꺾어 돌자 송이분교가 나타났다. 전 학년을 통틀어 학생은 단지 세 명뿐, 이 아이들마저 중학교를 가기 위해 뭍으로 나가고 나면 내후년엔 한 명만 남게 될 것이란다. 노인들이 돌담에 나와 해바라기를 하는 집 앞을 지나는 아이들을 보며 씁쓸한 생각을 한다. 언젠가 이 섬엔 초분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외지인도 마을 사람처럼 맞고, 죽은 자와 산 자가 구분되지 않고 구분할 필요도 없는 송이도 마을을 떠나 올 땐 조금쯤 알 것도 같았다. 세상 저편의 마음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배가 멀어질 때까지 손 흔드는 송이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다시 해지는 법성포로 돌아왔다. 붉게 붉게 하늘을 적시며 해가 지고 있었다. 물 빠진 법성포의 배들은 갈 곳 없이 어둠에 휘감기고 있었다. 하루의 해를 바다 밑으로 떠나보내고 있었다. 내일 다시 조기떼와 함께 그물에 건져져 떠오를 해를 알고 있기에, 금세 다시 만날 것을 알기에 우리는 웃으며 손 흔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동해에서 돌아왔을까. 영광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 77번 국도에서 보내는 내 타전 소리가 서해의 밤하늘을 가로질러 동해의 밤하늘 별 하나로 떠올랐으면. 그렇게 우리 삶의 이 편과 저 편이 하나의 마음이라면, 멀리에 있어도 행복할 것이다. 올 한해도 지난해만큼 행복할 것이다. 언제라도 행복할 것이다. 뜨고 지고, 뜨거워졌다 식었다를 반복하며 우리는 함께 아이에서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되고 흙으로 돌아가, 이 생과 더 친밀해질 것이므로.





굴비는 민어과에 속하는 조기(助氣)를 소금에 절여 통으로 말린 것이다. 참조기, 보구치, 수조기, 부세, 흑조기 등 우리나라 연안에서 잡히는 약 10여 종의 조기류 가운데서도 참조기로 만든 것이 특히 맛있는데, 영광 법성포 굴비는 바로 이 참조기를 건조해 만든다. 옛날, 봄이 오면 법성포 앞바다인 칠산도 부근 바다엔 이런 참조기가 수없이 올라왔다고 한다. 요즘엔 이상 기온에다 중국 어선의 활동 등으로 겨울철에도 목포 남쪽의 가거도나 추자도, 동중국해 등지에서 조기를 잡아와 말린다.

영광 굴비의 명성은 칠산 앞바다에서 잡은 참조기를 인근 염산면과 칠산바다에서 생산된 천연 소금으로 염장해 법성포 특유의 햇살과 바람에 말리는 데서 비롯됐다. 간수를 빼 순수한 소금맛을 내기 위해 법성포 어민들은 굴비 절이는 데 사용할 소금을 선창가에 쌓고 1년 이상 묵힌다. 알맞게 절여 말린 굴비는 한 줄에 흔히 20마리(두름)를 꿰는데 큰 것은 5마리씩 10마리(오가재비)를 엮어 말린다. 오가재비는 백만 원이 넘는 것도 있다.
기운을 북돋아 주는 효험이 탁월하다해서 붙은 이름 조기(助氣)가 굴비로 된 데는 고려 인종 때 영광으로 귀양살이를 왔던 이자겸에서 유래한다. 영광에서 조기 말린 것을 처음 먹고는 “천하일미, 이 놈을 임금께 진상해야지. 내 비록 귀양살이 신세긴 하지만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굴비(屈非)라 하겠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한창 때는 수백 척의 어선으로 북적대던 법성포, 지금은 옛날 같지 않지만 약 200여 가구가 굴비를 말리고 판매하는 일로 생업을 삼고 있다. 포구 입구에서부터 끝까지 ‘굴비’가 들어 있지 않은 간판을 보기 힘들 정도다. 전화나 인터넷을 이용한 택배 주문으로 굴비를 사러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법성포의 바닷바람에 말리는 것을 보고 만지고 굴비정식을 한 상 먹어보려면 직접 가보는 수밖에 없다. 포구 안쪽에 위치한 장보고굴비집(061-356-7608)에 가면 영광 굴비의 비결을 주인 내외가 친절히 설명해주고 판매도 한다. 영광 법성포마을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gulbi.invil.org)에서 법성포 굴비와 생산, 판매 등에 관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굴비정식은 법성포에서 가장 유명한 30여 년 내력의 일번지식당(061-356-2268, 1인분 2만 원)이 있다. 40여 가지나 되는 전라도식 한정식 찬에 입이 딱 벌어지지만 가격이 부담스러우면 근처 강화식당(061-356-2562, 1인분 1만 원)도 괜찮다. 푸짐함으론 일번지식당에 견줄 수 없지만 굴비맛은 뒤지지 않는다는 게 마을사람들의 평이다.



섬으로 이루어진 낙월면의 가장 중앙에 있는 섬으로 4.4㎢의 면적에 해안선 길이 15㎞, 50여 가구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법성포 위쪽 계마항에서 하루 한 번 여객선이 다니고 있지만 파도가 높은 날에는 그마저 뜨지 못한다. 마을 바로 앞에 흰 조약돌 해수욕장과 전국 최대 규모로 알려진 왕소사나무 군락지, 초분 등이 있는 송이도는 마을이 워낙 작고 여행객들의 방문도 적어 낯선 이들이 오면 거의 모든 마을사람들이 곧 알게 된다.
 
“이 겨울에 그 사람들 어째 왔뎌?” “초분 볼라고 왔따는디.” “앗따 까짓 초분 모 볼게 있다고 그 먼데서 와. 배삯 찻삯 나한테 보내주면 내가 짱하게 찍어 보내줄란디.” “워메, 그 사람들 사진기가 보통 사진기가 아니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혀.” 화장실에서 마을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우연
 

히 들었다. 이렇게 삽시간에 퍼진 낯선 이들의 정보, 마주치는 마을사람들마다 “초분 볼라고 왔담서요?” 모두가 아는 체다. 2~3시간 정도면 마을을 대충 둘러볼 수 있다. 그렇게 환영을 받으며 초분은 물론 학생이 세 명뿐인 송이분교도, 송이교회도, 마을에 전기를 대는 발전소도, 전국에 하나뿐이라는 몽돌해변도 둘러보았다.


군대 간 아들 은근한 자랑으로 점심을 해준 민박집 아줌마, 믿기지 않던 젊은 얼굴로 일행을 놀라게 한 50대 중반 학교 선생님, 깍듯하게 인사 잘 하던 송이분교 5학년 지희·지영이, 잘 생기고 의젓한 폼으로 카메라를 주눅들게 하던 이장님, 떠나는 배를 향해 오랫동안 손 흔들던 우체부 아저씨…. 짚으로 덮은 무덤 초분보다, 송이라는 예쁜 이름보다, 몽돌로 이루어진 해변보다 잊지 못할 송이도 사람들, 정지된 풍경으로 오랫동안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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