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진/사진으로본 풍경

[사진]객산과 벌봉 - 경기 광주 남한산성

박상규 2009. 9. 22. 14:45
선법사에서 객산301m를 지나 벌봉521m 오르는 길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
여행산행일:사진에 있는 날자
선법사는 경기 하남시 교산동에 있는 작은 절이나, 보물 981호 마애약사불좌상과 온조어용약수가 있는 곳으로, 특히 불상에는 만든 시기가 음각명문되어 있어 많이 알려진 곳이다. 들어 가는 길이 좁고, 굽은 길이 많아 운전이 조심스럽다.

객산까지는 특징없는 산길이 넓고 그늘이다. 객산을 지나면 가끔은 길이 희미하나 계속 직진하여 오르면 봉우리 여나무개를 오르락 내리락... 암문에 닿는다.

파리떼 수천마리가 귀에서 앵앵, 모기는 두꺼운 옷을 뻥뻥 뚫고, 이름모를 벌레들....

01. 벌봉 벌바위 상단



02. 탑꽃
    산지의 나무그늘에서 자란다. 높이 10∼30cm이다. 줄기는 비스듬히 서서 가지가 갈라지며 꼬불꼬불한 털이 난다. 밑부분의 잎과 가운뎃부분의 잎은 달걀 모양이거나 넓은 달걀 모양이고 윗부분의 잎은 좁은 달걀 모양이다. 끝이 뾰족하고 밑부분이 둥글며 길이 2∼5cm, 나비 1∼2cm이다.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잎자루는 길이 5∼15mm이다.

    꽃은 6∼8월에 흰색으로 피는데, 줄기 끝이나 잎겨드랑이에 모여 달린다. 작은포는 줄 모양이며 매우 작다. 꽃받침은 길이 3.5∼4mm이며 맥 위에 잔털이 난다. 화관은 길이 8∼9mm로 통부분이 짧고 윗입술꽃잎이 얇게 2개로 갈라지며 아랫입술꽃잎은 깊게 3개로 갈라진다. 4개의 수술 중 2개는 암술대와 길이가 비슷하다. 열매는 분열과로서 거의 둥글고 길이 1mm 정도이다. 한국·일본에 분포한다.


03. 누리장나무
    개나무·노나무·깨타리라고도 하며 냄새가 고약하여 구릿대나무라고도 한다. 산기슭이나 골짜기의 기름진 땅에서 자란다. 높이 약 2m이다. 나무껍질은 잿빛이다. 잎은 마주나고 달걀 모양이며 끝이 뾰족하다. 밑은 둥글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으며 양면에 털이 난다. 잎 길이 8∼20cm, 나비 5∼10cm로 겉에는 털이 없으나 뒷면에는 털이 나며 잎자루는 길이 3∼10cm이다.

    꽃은 양성화로 8∼9월에 엷은 붉은색으로 핀다. 취산꽃차례로 새가지 끝에 달리며 강한 냄새가 난다. 꽃받침은 붉은빛을 띠고 5개로 깊게 갈라지며 그 조각은 달걀 모양 또는 긴 달걀 모양이다. 화관은 지름 약 3cm이고 5개로 갈라진다. 열매는 핵과로 둥글며 10월에 짙은 파란빛으로 익는다.

    유사종으로 가지와 잎에 갈색 털이 빽빽이 나는 것을 털누리장나무(var.ferrungineum), 잎 밑이 심장밑꼴이고 끝이 뾰족하며 꽃받침조각이 좁고 긴 것을 거문누리장나무(var.esculentum)라고 한다.

    어린 잎은 나물로 먹고 꽃과 열매가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심는다. 생약의 해주상산(海洲常山)은 잔 가지와 뿌리를 말린 것인데, 한방에서 기침·감창(疳瘡)에 사용한다. 한국(황해·강원 이남)·일본·타이완·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04. 개나무, 구릿대나무, 누리개나무, 누룬나무, 개똥나무



05. 마편초과 - 마편초는 철마편. 용아초. 투골초. 토자초라고도...



06. 버섯



07.



08. 객산에서
    하남IC에서 나오면
    오른쪽으로는 검단산, 팔당대교 건너면 예봉산이며 청평,양평 양수리로 가는 6번 도로를 만난다. 길 왼쪽으로는 신안아파트이며 팔당댐의 방류로 한강물이 붉게 보인다


09. 고골로 들어 가는 입구의 동네



10. 쉼터



11. 달 나왔네~~

    달나왔네 달나왔어 구름아래 달나왔네

    사람들이 뛰놀적엔 구름뒤로 숨었등만
    짐생들이 나옹께로 달도따라 뛰나오네

    인간들이 없는세상 무서울게 뭐있겠나
    우리끼리 춤을춤서 밤새도록 놀아보세

    사람눈깔 무서워서 숨어살던 우리들도
    보름달이 뜨고봉께 어화덜싸 즐겁네야.

    톡볼가진 바위들도 우리들의 놀이텀세
    아무데나 올라가서 소구치고 메구치세

    어야어야 여우영감 왼쪽으로 올라가게
    한가운데 바윗돌은 사슴놈이 올라갔네

    어부쩡쩡 할매소는 서쪽으로 올라가소
    달빛아래 자네꼴이 구름모냥 재밌네야.

    정신없이 뛰놀다가 사람오면 큰일나네
    달구새끼 새새끼는 날아올라 망을보소

    인간들은 우릴보고 짐생이라 말하지만
    고놈들이 한짓보면 짐생보다 더못허데.

벌봉 오르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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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벌봉 바로 옆의 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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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산성 설계의 치명적 실수
    병자호란 당시에는 남한산성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벌봉이 산성 밖에 있었고...
    오랜 후에 외성을 쌓았다고...
    지금은 숲이 우거져 남한산성 안쪽이 보일락 말락


25.청 태종이 칼로 베어 두동강으로 만들었다는 벌봉의 벌바위
    깨어진 틈으로 들여다 보았다. 애들이 기어다닐만한 크기의 틈새가 있다.


    벌바위[봉봉(蜂峰)]

    벌봉은 남한산성 북문 밖에서 동쪽으로 건너다 보이는 뾰족한 바위산이다.
    조선 인조 재위시인 병자호란을 전후해서의 일이다. 조선을 침공할 계획을 짜고 있던 청 태종이 장군 용골대(龍骨大)를 시켜 조선의 도성과 그 일대의 지도를 자세히 살피던 중 청 태종이 한 지점을 가리키며
    「이 바위가 틀림없이 성 밖에 있었느냐?」
    고 물었다. 용골대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청 태종은 크게 기뻐하며

    「수고하였도다. 이제 우리가 조선을 쳐 들어가면 조선 임금은 반드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지도를 살펴보니 산성의 정기가 모두 이 바위에 서려 있어 이를 깨뜨리지 않으면 산성을 점령하기가 극히 어려울 것이어늘 다행히 바위가 성 밖에 있다하니 가는 즉시 이 바위부터 깨뜨리도록 하라!」
    고 지시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한양이 청군에 함락되자 인조는 과연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했다.
    그리고 산성을 포위한 청군은 성(城)의 정기가 있다는 바위부터 찾았는데, 우거진 숲 속에 있는 그 바위에는 수많은 땅벌[야생봉(野生蜂)]이 집을 짓고 있어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에 청군은 그 일대에 불을 지르는 등 천신만고 끝에 화약으로 바위를 깨뜨렸더니 뇌성벽력이 일고 연기가 오랫동안 하늘에 뻗치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 바위 봉우리를 벌(蜂) 혹은 봉암(蜂岩)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우리 조정에서는 뒤늦게 이런 사연을 듣고 당초의 성에서 연결된 겹성을 그 봉우리 밖까지 쌓았으므로 지금은 외성(外城)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6.



    丙子胡亂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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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원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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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조회풀 - 병조회풀, 병모란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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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개머루 - 돌머루·왕개머루라고도 한다
    비슷한 종으로 어린 가지와 잎자루, 잎 뒤에 짧은 털이 나는 털개머루(for. ciliata), 잎에 흰색 얼룩점이 있고 잎자루와 어린 줄기가 자줏빛인 자주개머루(for. elegans), 잎이 5갈래로 갈라지는 가새잎개머루(for. citrulloides)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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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담쟁이덩굴 Boston ivy
    비슷한 종류로, 잎이 5개의 작은잎으로 구성된 손바닥 모양의 겹잎이면 미국담쟁이덩굴(P. quinquefolia)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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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벌노랑이 - 벌조장이, 백맥근, 우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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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41. 코스모스



42.



43. 부처꽃



44. 비비추



45. 백일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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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다알리아 - 선법사에서



48. 나도사프란



49. 쉬땅나무



50. 쉬땅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