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진/사진으로본 풍경

[사진]명성황후 생가 - 경기 여주군 능현리

박상규 2009. 10. 9. 18:11
명성황후의 생가
경기 여주군 능현리
2002년 3월 7일 날씨 춥고
明成皇后 [1851~1895] :

본관 여흥(驪興). 성 민씨(閔氏). 여주(驪州) 출생. 증(贈) 영의정 치록(致祿)의 딸.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되었다.

그러나 금실이 좋지 못했고,
더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출생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흥선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져 나갔다. 점차 고종의 애정도 독점하여, 1871년 원자를 낳았으나 5일 만에 죽자,

흥선대원군이 진상한 산삼(山蔘) 때문이라고 단정, 더욱 증오심에 불탔다.
1873년 일본에 征韓論이 대두되어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景福宮 중건으로 民生苦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失政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儒林의 거두 최익현을 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모든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親政을 선포하게 하여 민씨의 외척정권이 수립되었다.

결국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壬午軍亂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 윤태준 집을 거쳐 충주 ·장호원으로 전전하며 피신생활을 하던 중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전의 국상이 선포되나,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되자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공작하고, 민씨정권을 재수립하였다.
점차 정권을 농단하여 대원군파에 대한 복수에 열중하고, 무당을 궁궐에 끌어들여 굿을 하며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한다는 명목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등, 민씨 일족의 부패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1884년 甲申政變으로 민씨 일족이 실각하자 심상훈 등을 사주, 청나라의 개입으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일본세력의 침투로 김홍집 등의 친일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흥선대원군의 재등장으로 甲午更張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가 을미사변을 일으켜, 8월 2일 일본 깡패를 궁중에 침입시켜서 乾淸宮에서 그녀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그 뒤 그녀는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다가, 10월 復號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밖 홍릉에 장사지냈다. 







민치록閔致祿 [1799~1858]

본관 여흥(驪興). 시호 효정(孝貞). 명성황후의 아버지. 첨정(僉正)을 지냈다.
죽은 후 1866년(고종 3) 딸이 왕후로 책봉됨으로써 영의정 ·여성부원군에 추증되었다------- 이상은 야후의 백과사전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