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홍이 곱게 핀 수비초등학교 신암분교
영양군 신원마을에서 36번 국도를 만나는 옥방에 이르는 외길을 30분, 단 한 대의 차도 스치지 않은 채 내내 홀로 달렸다. 이토록 속세에서 완벽하게 분리된 오지마을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조그마한 시골 분교가 보였다. 고학년실, 저학년실, 급식실, 과학실이 하늘색 스레트 지붕 아래 사이좋게 나란히 도열하고 있었다. 라면 상자만한 구령대에 올라 잠시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전교생이 다섯 명뿐인 수비초등학교 신암분교. 신암분교 앞 참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마당에서 분교 아이에게 물었다. 3학년만 유일하게 두 명, 2, 4 ,6학년이 각각 한 명씩이라고 했다. 자신을 4학년이라 소개한 분교 아이의 붉은 뺨이 진홍빛 백일홍 빛과 닮아 있었다.
열차가 아니면 올 수 없는 곳 승부역 분명 지도에는 '분천'역에서 '승부'역까지 노란색으로 가는 실선이 이어져 있었다. 차를 세우고 양은솥 화덕에 옥수수를 삶는 아주머니께 재차 확인했다.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이 없다 했다. 분천에서도 현동에서도 승부에 직접 연결되는 길은 없다고 했다. 분명히 현동을 지나 청옥산을 넘어야만 승부역으로 가는 길목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한동안 '환상선 눈꽃 열차'에 대한 환상을 가진 적이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여행 테마를 '환상선'이라 했을까? 환상선 눈꽃 열차를 타기 위해 밤새도록 눈 내린 아침 몇 번인가 청량리역에 전화를 했었다. 결국 열차는 타지 못했다. 그리고 환상에 대한 내 환상도 완벽한 착각임을 깨달았다. 영동선 철로 어딘가에서 돌아서 오는 환(還))상선이라 했다. 그래도 내 마음 속엔 여전히 추전, 승부역으로 기억되는 환상의 간이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엔 늘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몇 번인가 차를 세우고 되돌아 왔다. 분명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무래도 승부역을 쉽사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모양이다. 길 찾기에 지친 시어머니가 슬슬 퉁박을 주기 시작한다. 어디 아무 곳에나 계곡에 발 담그면 되지 그까짓 시골 간이역 찾느라고 해 떨어지겠다 야단이시다. 길도 험하고 볼 것도 없는 손바닥만한 간이역에 뭐하러 가는지 길을 가르쳐주면서도 차라리 반문이다.
승부역은 계곡 끝에 숨어 있었다. 낙동강 상류라 했다. 도중에 마주 오는 차라도 만나면 전혀 해결 방법이 없는 굽이굽이 삼십리 오솔길이었다. 제철을 맞은 왕원추리와 참나리가 냇가 돌 틈에서 서로 진홍빛을 발하고 있었다. 케일, 양배추 등 검은빛을 띤 고랭지 채소들이 손바닥만한 산비탈을 덮고 있었다. 승부역에 환상선 눈꽃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이면 광주리에 농산물을 이고 와 팔던 촌로들이 배추 모종을 옮기고 있었다. 할아버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자갈을 고르며 모종을 옮기는 산비탈엔 온통 할머니들뿐이다. 승부역 가는 길을 묻기가 미안할 만큼 구릿빛 얼굴로 모종을 옮겨 심고 있었다. 바로 모퉁이를 돌면 승부역이 나타난다고 했다.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승부역 경북 최고의 오지 마을인 영동선 철길의 승부역은 열차가 아니면 가기 어려운 곳이다. 철도청에서 98년 겨울 순수한 자연 풍경을 간직한 승부역을 연계한 환상선 눈꽃 순환열차를 개발. 운행함으로써 일반 고객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철도청 최고의 히트상품인 환상선 눈꽃열차는 오전 8시를 전후해 서울 청량리역을 출발, 경북 오지 승부역, 가장 높은 태백 추전역을 돌아 당일 오후 10시 전후에 청량리역으로 되돌아오는 하루 코스 여행상품이다. 눈으로 뒤덮여 있는 이들 구간은 자동차로는 접근하기 매우 힘든 곳으로, 총 구간 569km 동안 다리 497개와 크고 작은 터널 204개를 통과한다.
태백광산지역의 지하자원을 수송하기 위해 1955년 12월 30일 완공된 영암선(영주-철암, 87.0km)은 교량이 55개, 터널이 33개로 전체 구간의 20%가 교량과 터널로 이루어진 난공사였다 한다. 엄청난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의 기술로 건설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이곳 승부역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을 받아 '영암선 개통 기념비'를 세웠다. 승부역과 승부마을을 잇는 주황색 출렁다리를 건너 낙동강 물길이 돌고 있는 개울 저편에 승부역이 있었다. '승부(承富)'라는 지명은 옛날 이곳이 다른 마을보다 잘 살았고 부자 마을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손바닥만한 산비탈 자갈밭뿐인,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간 오지마을이 다른 곳에 비해 부자였다 하니 당시 고단했던 주변 마을의 살림살이를 그저 짐작만 할 따름이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60년대 이곳에 근무했던 역무원이 남긴, 수송의 심장에 근무하는 자긍심 넘치는 시가 새겨진 시비가 채 한 평도 되지 않는 보랏빛 도라지 꽃 속에서 한여름 여행객을 맞고 있었다. 2003년 태풍으로 소실되었던 철로를 주황빛 조끼를 입은 역무원들이 손질하고 있었다. 대합실도 없이 플랫폼 단풍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지나가는 기차를 맞으면 그만이다. 한여름 등줄기에 땀이 나면 플랫폼 한 가운데 설치된 수도꼭지를 틀어 세수를 하면 그만이다. 탄광지역의 지하자원을 실은 화물기차가 멀리 기적소리를 내며 터널 속에서 나와 터널 속으로 사라졌다. 밤새도록 눈이 내린 겨울 새벽 열차를 타고 다시 이곳에 오리라. 광주리 가득 먹을거리를 머리에 이고 온, 산비탈 자갈밭에서 배추 모종을 옮겨 심던 촌로들을 겨울에, 한겨울에 다시 만나고 싶다. 자갈밭에서 캔 겨우내 썩혀 만든 감자떡으로 허기와 추위를 달래며 한여름 이곳을 지키던 보랏빛 도라지꽃을 기억하고 싶다. 나는 오늘, 승부역에 서서 눈 쌓인 겨울 승부역에 선 나를 그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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