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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거산(虎踞山) 아래 "운문사"를 찾아서

박상규 2009. 10. 23. 16:35

 

 

호거산(虎踞山) 아래 다소곳이 자리잡은  "운문사"를 찾아서

 

 

 

 

 청도 운문사(운문승가대학)  @2008  사진사 : 양촌재/촌장셈(김진수)

 

 

 

 황금빛 출렁이는 어느 가을 날

 운문사 사리암을 다녀오면서 본찰인 운문사를 들렸다

 운문사는  천년의 숨결이 흐르는 비구니 스님들의 전문교육도량인 운문승가대학이 있는 곳이다.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 608년 (진평왕 30)에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중창
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835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 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현, 운문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
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해방이후 제1세 김상명 스님에서 제4세 박상웅스님까지 잠시 대처승이 거주하였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어 1998년부터 제13대 주지로 송혜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선원을 신축하여 교와 선을 아울러 익힐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었다.
2002년부터 제14대 주지로 고흥륜 강사스님이 부임하여 오늘에 이른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략 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운문사 입구에 도착하면 아름드리 소나무 군락이 참배객들을 먼저 맞이한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소나무 숲길옆으로 이번에 새로이 올레길을 만들어서 차량이 다니는 길과는 혼잡하지 않게 세심하게 배려한 흔적이 보인다

 

 이번에 새로이 개설 된 올레 길(운문사까지 들어가는 산책로)

 

 운문사로 들어가는 올레길을 따라 들어가니 길옆에 서 있는 감나무에는 빠아간 감들이 나무 저 높이 메달려 있고, 길가에 서 있는 고목에는 가을 단풍잎으로 물들어 그 색깔이 곱기만 하다.

 

 

 가을의 전령 갈대와 고목의 단풍이 어울려져서 가을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멀리서 보니 운문사의 앞에 있는 밭에는 스님들의 수고로 인하여 가을배추가 맛깔스럽게 크고 있었고, 스님들도 땀을 흘리시며 배추를 손질하고 계셨다.

 

  

  

 

 

  

 운문사와 사리암으로 가는 갈림길 주차장 입구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거목이 수호신 마냥 지키고 서 있다.

 

 

 

  

 운문사의 돌담길옆에는 벚꽃이 벌써 단풍의 옷을 입고 가을 저 만치 밀어내고 있다.

 

 

 

 운문사 (운문승가대학)에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운문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천연기념물 제180호 인 반송(처진 소나무)였다.

 

반송의 유래는 500여 년 전 이곳을 지나가던 스님이 시든 가지를 꽂은 것이 자라나 임진왜란 때 벌써 성목이 되었다 한다.

왜란의 화가 이곳까지 미쳐 사찰건물은 탔으나 반송은 칡덩굴이 감싸 화를 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1년에 한 번 봄에 열두 말씩의 막걸리를 주어 수세의 싱싱함을 보존해 주며.....

 반송의 수령은 500여 년, 나무의 높이는 10.3m이고, 둘레는 3.45m이며 사방으로 각각 10m씩 뻗은 가지가 약 30여 평의 넓이로 우산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자료 : 운문사 홈페이지에서)

 

   

 

  

 

 

 운문사는 557년(진흥왕 18)에 한 신승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7년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현 운문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 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부터 이 절에 머물며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세속오계(원광국사)..

 

첫째.    사군이충(事君以忠)  나라를 섬김에 충성으로써 하라

둘째.    사친이효(事親以孝)  부모는 섬김에 효로써 하라

셋째.    교우유신(交友有信)  벗을 사귐에 믿음으로써 하라

넷째.    임전무퇴(臨戰無退)  전쟁에 나가서는 물러나지 말라

다섯째. 살생유택(殺生有擇)  산 목숨을 죽임에 가려서 하라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삼강(三綱).. 

하나. 군위신강(君爲臣綱)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둘.    부위부강(夫爲婦綱)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셋.    부위자강(父爲子綱)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오륜(五倫)

하나.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는 의가 있어야 한다

둘.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은 친함이 있어야 한다

셋.    부부유별(夫婦有別)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한다

넷.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아이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

다섯. 붕우유신(朋友有信) 벗과 벗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운문사 만세루와 대웅보전, 그리고 법륜 

 

 

 

  

 

 

 

 

 

범륜(梵輪)

석가가 설법하는 것을 법륜을 돌린다고[轉法輪] 한다. 법을 전륜왕(轉輪王)의 수레바퀴 모양의 고대 인도의 무기인 윤보에 비유한 것으로,

세속의 왕자로서의 전륜왕이 윤보를 돌려 천하를 통일하는 것과 같이, 정신계의 왕자로서의 석가는 법륜을 돌려 삼계(三界)를 구제한다.

또한 윤을 법의 뛰어난 점에 비유한 세 가지 의미로 설명한다.

그 한 가지는 원만(圓滿)의 뜻으로, 석가의 교법은 원만하여 결함이 없는 것을 윤의 원만한 모양에 비유하며, 둘째는 타파(打破)의 뜻으로,

석가의 교법은 중생의 망견(妄見)을 타파하는 것을 윤을 돌려 어떤 물건을 부숴뜨리는 것에 비유한 말이며,

셋째는 전전(展轉)의 뜻으로, 석가의 교법이 전전(轉轉)하여 어느 곳에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이러한 법륜은 만자(卍字)와 함께 불법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불상이 조상(彫像)되기 전 조각이나 회화에서 보리수, 불탑 등과 같이

부처의 형상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글..blog.naver.com/singunji)

 

 

 

 

 

 

 

 운문사 가을의 계곡은 마치 옥색물감을 풀어 놓은듯 맑고 깨끗하다 

 

 

 돌아오는 길에 들른 전통 손 칼국시 식당 / 넘 분위기 좋고 아늑하였다

 

 

 

  

 

 

 

 

 

운문사의 암자



사리굴(邪離窟)은 운문산에 있는 네 곳의 굴 중 하나이다. 즉 동쪽은 사리굴(邪離窟), 남쪽은 호암굴(虎巖窟), 서쪽은 화방굴(火防窟), 북쪽은 묵방굴(墨房窟)로서 옛날에는 이 굴에서 쌀이 나왔는데 한 사람이 살면 한 사람 먹을 만틈의 쌀이, 두 사람이 살면 두 사람 몫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하루는 공양주 스님이 더 많은 쌀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어 구멍을 넓히고 부터 쌀이 나오지 아니하고 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장소는 나반존자(那般尊者)상이 모셔진 바로 아래다.


아래에서 보면 왼쪽굴이 그곳이고 지나쳐보면 어딘지 분간이 가지 않을 곳으로 특별히 굴 같지는 않다. 운문사 사적에는 사리암은 고려초 보양국사(寶壤國師)가 930년에 초창하였고 조선 헌종 11년(1845)에 정암당(靜庵堂) 효원대사가 중창하였으며 1924년 증축, 1935년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리암의 천태각(天台閣)은 일명 독성각(獨聖閣)이라고도 하며 조선 헌종 11년(1845)에 신파대사(新派大師)가 초창하여 나반존자상을 봉안하였다. 이 나반존자상의 후면에는 조선 철종 2년(1851)에 봉안한 독성탱화(獨聖撑畵)와 1965년에 경봉(鏡峰)화상이 점안한 산신탱화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천태각 밑에 있는 비석은 금호당화상(金虎堂和尙)이 세운 중수비이다. 1977년 비구니 혜은(慧隱)스님이 원주로 부임하여 1978년 전기불사를 시작으로 1980년에 전 부산 거림회 회장 이인희 거사의 후원으로 3층의 요사를 신축하였고 1983년 현재의 관음전, 자인실, 정랑 등을 개축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위에서부터 천태각 그 뒤에 산신각이 아주 조그만하게 각각 한칸으로 지어져 있으며 천태각 왼쪽에 굴이 하나 있는데, 굴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사람이 그 굴에서 기도를 하게끔 돌로 바닥을 깔았다. 그 안쪽에 샘이 있어 물이 나오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그 옛날 쌀이 나오던 곳이라 한다. 그 한 계단 아래 관음전이 있고 관은전 좌측으로 한 계단 아래 자인실이 있으며 자인실 앞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왼편에 3층의 요사가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요사의 지붕이 관음전 앞마당이다. 좁은 터의 활용을 최대화 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또 그 왼편에 3층의 집이 하나 있으며 공양간 등 이곳도 요사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이 부산 거사림 이인희 회장 등이 후원하여 건립된 요사인 것이다.


사리암은 입구 삭도가 있는 곳의 다리에서부터 약 1천보(계단포함) 정도 올라와서 층암절벽 위에 세워진 암자이다. 이곳 사리암은 국내에서도 이름있는 나반존자의 기도처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나반존자는 석가여래께서 돌아가신 후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부처님이 계시지 아니한 동안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력을 세운 분으로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항상 천태산상에서 선정을 닦으며 열반에 들지 않고 말세 중생의 복밭이 되어 미륵불을 기다리는 존자이다.


근래엔 사리암에 가려고 하면 운문사 뒤편에서 출입을 통재하고 있어 사리암 신도 외 일반인은 쉽게 들어갈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운문사 계곡안 만은 심한 오염의 현 세태속에서도 아주 맑은 산천과 산골의 물고기 등을 볼 수가 있다. 이는 군에서 산의 휴식년제 실시로 인하여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는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사리암에 처음 가면 신기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사리암 맨 아래층에 다달으면 먼저 온 사람들이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손바닥에 땅콩을 올려놓고 깐돌아 깐돌아를 부른다. 깐돌이가 뭘까 조금 있으면 답이 나오는데 신기하게도 산새가 와서 손바닥 위에 있는 땅콩을 의심없이 물고 간다. 언제부터인지 이곳에 살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길을 들여놓아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과 새와의 신뢰가 이루어 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신도이건 등산객이건 식사때가 아니라도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간다. 그래도 스님들은 그것을 탓하지 않고 배고픈 사람은 요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무상보시며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인 것인가 보다. 공양을 마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언덕 아래에 비자나무가 바위 위에서 여러 그루 살고 있다. 오래되지 않은 날에 스님들이 심은 것이라 한다.


또한 조선 고종황제가 심열로 고생하던 중에 청우스님이 사리암에서 백일기도를 주관하였는데, 꿈에 선인이 나타나 임금님의 머리에 침을 꽂아주니 깨끗이 나았다는 효험담도 전해져 온다. 중생들에게 괴로움이 많아서인지 소원이 많아서인지 기도를 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사리암 나반존자 기도도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