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향기글

가슴찡한글...

박상규 2012. 6. 15. 10:26



               <얼마 전, 모 설문조사에서 복권에 당첨되면, 무엇부터 바꾸고 싶은가
               
              라는 질문이 있었다. 대다수의 남자들이 '아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대다수 여자들 또한, ‘남편’이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 방걸레질 하는 소리.......

              : ! 발 좀 치워봐.
                 
                (
              지금 허름한 바지를 입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방걸레질을 하는 그녀,
               
              아내...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만약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 역시
               
              아내라고 대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 점심은 비빔밥 대강 해먹을라 그러는데, 괜찮지?
              : 또 양푼에 비벼먹자고?
              : , 먹고나서, 베란다 청소 좀 같이 하자. 집안 청소 다 했더니,
                   
              힘들어 죽겠어.
              : 나 점심 약속 있어.
              : 그런 얘기 없었잖아.
              : .... 있었어. 깜박하고 말 안한거야. 중식이...
                   
              중식이 만나기로 했잖아.
              : ...그래? 할 수 없지 뭐

                            

                               

                

                  (해외출장 가있는 친구 중식이를 팔아놓고, 중식이한테도 아내에게
                 
              도 약간 미안한 마음은 들었지만, 한가로운 일요일, 난 아내와 집에
                 
              서 이렇게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
              나름대로 근사하게 차려입고 나가려는데, 커다란 양푼에 밥을 비벼
                 
              , 숟가락 가득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아내가, 나를 본다. 펑퍼짐한
                 
              바지에 한쪽 다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모양이 영락없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아줌마 폼새다.)


              : (우물거리며) 언제 들어 올거야?
              : 몰라... 저녁도 먹고 들어올지...
              : 나 혼자 심심하잖아. 빨리 들어와.
              : 애들한테 전화해 보든가....
              : (물 한잔 마시고) 애들 뭐... 내가 전화하면 받아주기나 해?
                   
              엄마 나 바쁘니까 끊어. 이 소리 하기 바쁘지.
              : 친구들 만나든가 그럼!
              : 내가 일요일 날 만날 친구가 어딨어?

              *
              밥 긁어서 먹는 소리....... 


                  (그렇다. 아내에게는 일요일에 만날 친구 하나 없다. 아이들 키우고
                 
              내 뒷바라지 하느라 그렇게 됐다는 게, 아내의 해묵은 레퍼토리다.
                 
              그 얘기 나오기 전에 어서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한다.)

                  (
              일단 밖으로 나가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끌어모아
                 
              술을 마셨다. 12가 될 때까지 그렇게 노는 동안, 아내에게 몇
                 
              번의 전화가 왔다. 받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는 배터리를 빼 버렸다.)                  

                                             

              *
              대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

                  (
              그리고 새벽 1시쯤 난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내가 소파
                 
              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자나보다 생각하고 조용히 욕실로 향하는데.......)

              : (아픈 듯) 어디 갔다 이제 와?
              : . 친구들이랑 술 한잔.... 어디 아파?
              : 낮에 비빔밥 먹은 게 얹혔나봐. 약 좀 사오라고 그렇게 전화했는데
                   
              받지도 않고...
              : ... 배터리가 떨어졌어.
              : 손이라도 좀 따줘.
              : 그러게... 그렇게 먹어대더라니... 좀 천천히 못 먹냐?
              : 버릇이 돼서 그렇지 뭐... 맨날 집안일 하다 보면, 그냥 대강 빨리
                   
              먹고 치우고... 이랬던 게... 

                  (
              어깨에서 손으로 피를 몰아서 손끝을 바늘로 땄다. 아내의 어깨가
                 
              어느새 많이 말라 있었다
              .) 


                  (
              다음날, 회식이 있어, 또 늦은 밤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 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 
              (
              그런데 아내가 또 소파에서 웅크린 자세로 엎드려 있다.)
              : 여보... 들어가서 자.
              : 여보... 나 배가 또 안 좋으네.
              : 체한 게 아직 안 내려갔나?
              : 그런가봐. 소화제 먹었는데도 계속 그래.
              : 손 이리 내봐
              (
              아내의 손끝은 상처 투성이였다.)
              : 이거 왜 이래? 당신이 손 땄어?
              . 너무 답답해서...
              : (버럭) 이 사람아! 병원을 갔어야지! 왜 이렇게 미련하냐

                  (
              나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느 때 같으면, 마누라한테 미련
                 
              하냐는 말이 뭐냐며 대들만도 한데, 아내는 그럴 힘도 없는 모양이었
                 
              . 그냥 엎드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난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내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 응급실 소음소리.......


              : (속삭) 여보. 병원 오니까, 괜찮은 거 있지.
              : 가만 있어봐. 검사 받아야 되니까.
              : 아니... 진짜 말짱해. 아까 잠깐 그렇게 아팠나봐.
              : 온 김에 검사 받고 가.
              : 뭐하러 그래~ 응급실 얼마나 비싼데~ 내일 병원 문 열면,
                   
              가서 검사 받을게.
              :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 가자니까. 완전 바가지야

                  (
              잡을 틈도 없이, 아내는 먼저 일어나 나간다. 나도 머쓱하게 아내를
                 
              따라 나온다. 하긴 아내의 말처럼 응급실은 보통 진료비보다 훨씬
                 
              비싸다.)                                      

                                      
              *
              거리 소음 + 걷는 소리.......

              : 진짜 괜찮아?
              : . 나 학교 다닐 때도, 시험 보기 전날이면, 배 아프고 그랬다?
                   
              그런데 병원만 딱 오면, 배가 안 아픈 거야. 그게 다 신경성이라
                   
              그런가봐.
              : 그러게, 사람 놀래키고 그래~~ 아프면 바로바로 병원 가고 그래.
              : 어머~ 당신 놀랬어? 어유~ 그래도 홀아비 되긴 싫었나봐?
              : 싫긴 뭐가 싫으냐? 홀아비 되면, 젊은 마누라도 새로 들이고 좋지.
              : 내가 말을 말아야지...


              * 걷는 소리....... 


                  (
              참 오래전부터 내 곁에서 이렇게 함께 걸어왔던 아내.
                 
              그녀와 아주 오랜만에... 함께 길을 걸어본다.)

                  (
              다음날 병원에 다녀온 아내는, 회사 앞에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 난데, 우리 점심 먹을까?
              : 바쁜데...
              : 회사 앞까지 왔는데?
              : 그래. 알았다. 병원은 갔다 왔어?
              : . 신경성 위염이래. 남편이 속썩이냐고 물어보더라.
                   
              의사선생님이.......
              : 나만큼 잘하는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뭐 먹고 싶어?
              : 죽 먹자. 요즘 좋은 죽집 많다며? 그런 데 가서 우아하게 먹어보고
                   
              싶다.
              *
              죽 떠먹는 소리.......

              : 여기 괜찮지?
              : 횟집에서 죽도 파네?
              : . 우리 회식할 때 자주 오는 데야.
              : 그런데 너무 비싸다. 죽 한 그릇에 만 오천 원씩이나 해?
                   
              태어나서 이렇게 비싼 죽은 처음 먹어보네.

              *
              바닥까지 긁어먹는 소리.......

                  (
              갑자기 열심히 죽을 먹는 아내가 안쓰러워 보였다. 만 오천 원짜리
                 
              죽 한 그릇이 아까워, 그릇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먹는 아내... 난 몇
                 
              십만 원짜리 술도 아무렇지 않게 먹는데... 내 아내는 태어나 이렇게
                 
              비싼 죽을 처음 먹어 본단다. 그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나 생각이 
                 
              들었다.)                               

                                        

              : 여보, 할 말이 있는데.
              : , 얘기해.
              : 추석 때 있잖아. 친정부터 가면 안 될까?
              : 왜 또 그래~ 어머니 성격 알면서~
              : 그러게. 30년 넘게 어머니 성격 아니까, 명절 때마다 당신 집부터
                   
              갔잖아?
              : 명절 때 시댁부터 가는 건, 당연한 거야.
              : 당신 집은 오남매야. 우리 집은 오빠랑 나밖에 없잖아.
                   
              엄마가 얼마나 외로워하시는데.......
              : 추석 끝나고 가면 되잖아.
              : 어머니도, 당신도 웃겨. 당신!
              : 여보.... 왜 이래. 새삼스럽게.
              : 그럼 이렇게 해. 추석 때 당신은 당신 집 가. 난 우리 집 갈 거야.
              : 어머니가 가만 계시겠어?
              : 안계시면 어떡 할 건데? 나도 할 만큼 했어. 맘대로 하라 그래.
              : 당신, 오늘 좀 이상하다.
              : 30년 동안, 그만큼 이기적으로 부려먹었으면 됐잖아.
                   
              내가 이정도 얘기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해                                 

                                              

                  (
              큰소리친 대로, 아내는 추석이 되자, 짐을 몽땅 싸서 친정으로
                 
              가 버렸다. 나 혼자 고향집으로 내려가자, 어머니는 노발대발하시며
              ,
                 
              세상천지에 며느리가 이러는 법은 없다고 난리를 치셨다
              .

               

                 지난 30년동안 한번도 없었던 일이니,

                 이번만큼은 노엽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오히려 마누라 편든다며, 내게도 잔소리를 늘어놓셨
              .

               

                  여동생은 여동생대로 제 새언니 흉을 보면서, 무슨 며느리가 그렇
                 
              게 제멋대로냐고 했다. 자기는 임신을 핑계로, 추석 전부터 우리집에

                 
              와서 쉬고 있으면서, 제 새언니가 친정에 간 건, 그렇게 못마땅한가

                 
              보다. 아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니, 우리 가족이지만,

                  하는 말마다 행동마다 참 얄미울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고 처음. 아내가 없는 명절을 보냈다.) 
                                                

                                             
              *
              문 탕 열고 들어오는 + 클래식 소리....... 

                  (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가 태연히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까지 틀어놓고 말이다.)

              :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
              음악 탁 끄는(쇼팽의 이별곡) 소리.......

              : 음악 들으면서 책 보잖아. ?
              : 제정신이야? 어머니 얼마나 화나셨는지 알면서,
                   
              명절 내내 전화 한 통화 안해?
              : 어머니 목소리 별로 듣고 싶지 않았어. 간만에 좋은 기분,
                   
              망칠 필요 없잖아.
              : ??
              : 가끔 뉴스에서 주부우울증으로 투신자살하는 여자들 얘기 들으면,
                   
              생각했었어. 남은 가족들은 어쩌라고 저랬을까...


              :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 그런데, 나 이제 이해가 돼. 그 여자들은 남은 가족들이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택했을 거야.
              : 그게 말이 돼?


              : 내가 지금 없어져도, 당신도 애들도 어머님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
                   
              을 거야. 처음엔 조금 슬프겠지만, 금방 잊을 거야!

              : ..... 여보?!.....

               

               

              : (울며) 여보. 나 명절 때 친정에 가 있었던 거 아니야
                 
              ,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 검사 받았어. 당신이 한번 전화만 해봤어
                 
              금방 알 수 있었을 거야. 당신이 그렇게 해주길 바랬어. 그래서
                 
              내가 어디로 갔을까 놀라서 나를 찾아주길 바랬어. 침대에 혼자 누워서
                  
              당신이 헐레벌떡 나타나 주면, 뭐라고 하면서 안길까... 혼자 상상 했었어.
                  
              그런데, 당신 끝내 안 나타나더라. 끝내 나 혼자 두더라

                  (
              아내의 병은 가벼운 위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날 나와 아내는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검사 결과에 대해 얘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
                 
              가는 내내 아내는 무거운 얼굴로 아무 말이 없었다.)


              : 죽으러 가냐?
              :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요즘 위암? 아무것도 아니야. 요즘은 다 고쳐.
              : 그래. 누가 뭐래.
              : 악성도 다 고친다구. 내 친구 차교수 알지? 그 친구도 위암3기였
                   
              는데, 멀쩡하잖아. 요샌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 거! 진짜 아무 것도
                   
              아니라구!!! 
                  (
              누구를 위로하기 위해 큰소리를 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내를 안
                 
              심시키기 위한 건지, 나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건지... 큰 소리 치

                 
              면서도 운전대 잡은 손에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그러면서도 난 끝까

                 
              지 중얼거렸다.)

              : ? ! 그런 거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것도...                                       

                                     
                  (
              난 의사의 입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 저 사람이 지금 뭐라고 말하
                 
              고 있는 건가, 내 아내가 위암이라고? 전이될 대로 전이가 돼서,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수술도 하기 어려운 상태니 마음의 준비

                 
              를 하시라고.... 가고 싶은 데 있다고 하면 데려가 주고, 먹고 싶은

                 
              거 있다고 하면 먹게 해 주라고....  삼 개월 정도 시간이 있다고....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자기가 뭔데. 자기가 하나님인가
                 
              자기가 남은 시간을 어떻게 아나. 내 아내가 내 곁에서 3개월을 
                 
              살지, 3년을 살지, 30년을 살지 어떻게 알고....
                 
              저렇게 함부로 말을 한단 말인가.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멱살이라도 잡고,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의사의 입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왔다.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맑았다.)
              : ...... 여보!!...... 
                  (
              아내의 음성이 조용히 귓가에 내려 앉는다. 아내가 살포시 팔짱을 끼고,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다.
                 
              지금 그녀를 보면, 절망으로 가득한 내 얼굴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그러긴 싫었다.)

              : 여보....
              : (무뚝뚝) !
              : ...........미안해.
              :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내가 아까 말했지? 차교수도 처음에 병원
                   
              갔을 때, 똑같이 말했대. 차교수도 3개월, 아니 2개월 산다 그랬대
              !
                   
              그런데 지금 봐. 멀쩡하게 다니잖아. 그 친구가 나보다 힘도 더 세고

                   
              더 튼튼해! 의사 자식들이 하는 말, 저거... 다 뻥이야
              !
                   
              사람 겁주고... ? 겁줘서 돈 뜯어낼라고 하는 소리야
              !
                   
              믿지 마, 저런 말!! 

                  (나는 바보다. 끝까지 아내 앞에선 강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큰 
                 
              소리 치고 있다. 하지만 난 지금 너무 무섭다. 아내가 잡고 있는 내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너무너무 겁나고 무섭다. 아내의 따뜻한 손
                 
              이 내손을 꼭, 더 꼭 잡아준다.) 

                             

               

                


              *
              엘리베이터 띵 올라가는 소리....... 

                  (
              집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서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암에 걸렸다, 누구 부인이 죽었다.. 이런 얘기 많이 듣는 나이

                 
              가 됐지만, 그런 일이 내게 닥칠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 탄 아내를 보며, 앞으로 나 혼자 이 엘리베이터를 타
                 
              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문을 열었을 때, 펑퍼

                 
              짐한 바지를 입은 아내가 없다면, 방걸레질을 하는 아내가 없다면,,,,


                 
              양푼에 밥을 비벼먹는 아내가 없다면, 술 좀 그만마시라고 잔소리해
                 
              주는 아내가 없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를 생각했다. 처음으로 우리
               
                  
              집으로 장만한 이 아파트에는 아내의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다.)
                 

              *
              대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

              여보, 우리 이사갈까
                  (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아내가 말했다.)
              : 여기 우리 둘이 살기에는 너무 넓잖아?
              : 됐어. 난 여기가 좋아.
              : 아니야. 너무 낡았어. 이 집 팔고 조금 작은 평수, 새집으로 이사
                   
              가면 좋잖아.
              : 됐다고 하잖아.
              : 이 집이 당신 괴롭힐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 집...
                   
              정말 꼴도 보기 싫다


                  (
              아내는 함께 아이들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부모가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달
              갑지도 않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공부에 관해, 건강에 관해, 백번도 

                  
              넘게 해온 소리들을 해대고 있다. 아이들의 표정에 짜증이 가득한대도, 
                 
              아내는 그런 아이들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만 있다.  

                 
              난 더 이상 그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
              담배 불 켜는 소리.......
              : ... 또 담배....
              : ... 잔소리.... 그러니까 애들이 싫어하지.
              : 여보, 집에 내려가기 전에.. 어디 코스모스 많이 펴 있는 데
                   
              들렀다 갈까?
              : 코스모스?
              : 그냥... 그러고 싶네. 꽃 많이 펴 있는 데 가서, 꽃도 보고,
                   
              당신이랑 걷기도 하고.... 
                  (
              아내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이런 걸 해보고 싶었나보다
                 
              비싼 걸 먹고, 비싼 걸 입어보는 대신, 그냥 아이들 얼굴을 보고
                 
              꽃이 피어 있는 길을 나와 함께 걷고.)
              : 당신, 바쁘면 그냥 가고...
              : 아니야. 가자.


              *
              바람부는 + 갈대숲 일렁이는 소리....... 

                  (
              코스모스가 들판 가득 피어있는 곳으로 왔다. 아내에게 조금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여보,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어.
              : 뭔데?
              : 우리 적금, 올 말에 타는 거 말고, 또 있어.
              : ?
              : 내년 4월에 탈 거야. 2천만원 짜린데, 3년 부은 거야. 통장,
                    
              싱크대 두 번째 서랍 안에 있어. 그리구... 나 생명보험도 들었거든
              .
                    
              재작년에 친구가 하도 들라고 해서 들었는데, 잘했지 뭐
              .
                   
              그거 꼭 확인해 보고.......

              : 당신 정말...
              : 그리고 부탁 하나만 할게. 올해 적금 타면, 우리 엄마 한 이백만원
                   
              만 드려. 엄마 이가 안좋으신데, 틀니 하셔야 되거든
              .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오빠가 능력이 안되잖아. 부탁해

                  (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아내가 당황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소리내어... 엉엉.....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말았다
                 
              이런 아내를 떠나 보내고... 어떻게 살아갈까....)

              *
              문 여는 소리....... 

                  (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난 깜짝 놀랐다. 집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침대와 소파 식탁 정도만이, 모든 것이 빠져나간
                 
              자리에, 오도카니 남아 있었다.)

              :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내가.. 오빠한테 부탁해서 이사 좀 해달라 그랬어.
              : ?
              : 오빠가 동네 가르쳐 줄 거야. 여보, 나 떠나고 나면 거기 가서 살아.
              : 당신 정말 왜 이래!! 그럴 거면, 당신이랑 같이 가.
              : 아니야. 난 새집 안들어 갈래. 거기선 당신이 새 출발해야지.
              : 당신은, 내가 정말 당신 잊길 바래?
              : ......솔직히 말하면 아닌데... 그렇다고, 당신이 나 떠나고 나서
                   
              청승 떨면서 사는 건, 더 싫어.

                  (
              텅 비어 있는 집의 한 구석에, 우리 부부가 앉아 있다. 베란다 사이로
                  
              스며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아내가 떠나고 난 내 삶은, 지금 
                  
              이 빈집처럼 스산할 거라는 걸 안다.)

               

                               


              * 풀벌레 소리....... 

                  (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아내가 내 손을 잡는다. 요즘 들어 아내는 
                   
              내 손을 잡는 걸 좋아한다.)


              : 여보, 30년 전에 당신이 프로포즈 하면서 했던 말 생각나?
              : 내가 뭐라 그랬는데....
              : 사랑한다 어쩐다 그런 말, 닭살 맞아서 질색이라 그랬잖아?
              : 그랬나..
              :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당신이 나보고 사랑한다 그런 적 한 번도
                   
              없는데, 그거 알지?

              : 그랬나...
              : 어쩔 땐 그런 소리 듣고 싶기도 하더라.
              : ..... !..... 


                  (아내는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도 깜박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커튼이 뜯어진 창문으로,

                   아침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 여보! 우리 오늘 장모님 뵈러 갈까?
              : .................

              : 여보. 장모님 틀니... 연말까지 미룰 거 없이, 오늘 가서 해드리자.
              : ............... 
                  (
              좋아하며 일어나야 할 아내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난 떨리는 손으로 아내를 흔들어 본다.)
              : 여보.... 장모님이 나 가면, 좋아하실텐데.... 여보, 안 일어나면
                   
              안간다여보?!..... 여보!?...... 

                  (이제 아내는 웃지도, 기뻐하지도, 잔소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난 아내 위로 무너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어젯밤.... 이 얘기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  그렇게, , 아내를 보내 버렸다.) 


               
              <
              김기덕이 진행하는 모 방송프로그램에 나왔던 실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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