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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마땅한 여행지가 없을까 물색하던 중에 여행 길라잡이 최형이 충북 제천에 있는 청풍호반을 추천하며, 일정이 맞으면 동행하자고 했다. "청풍명월의 본향인 제천의 청풍이 바로 그런 곳이지요. 수려한 호반과 아름다운 산세, 그리고 맑은 계곡... 소위 3색이 어우러진 정말 좋은 곳이라니까요!"
"금수산을 배경으로 드넓은 충주호가 펼쳐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킵니다. 눈을 들어 청풍호 주변을 볼 것 같으면 청풍문화재단지, 유람선과 수경분수, 청풍랜드, KBS, SBS 촬영장 등이 있고, 뒤쪽으로는 월악산이 송계계곡, 용하구곡, 탁사정 등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지요." 최형이 여행 전문가라도 되는 양, 약장수처럼 한바탕 연설을 하자, 아내도 솔깃했는지 넋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여보, 우리도 가요?"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 10월 초 우리는 청풍호반으로 여행을 가게 됐다. "그런데 최형, 청풍에 가면 명월을 볼 수 있기는 한 거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 박형이 같이 가면 틀림없이 볼 수 있을 거외다." 함께 가기로 한 박형의 질문에 대한 최형의 대답이었다. 옆에서 듣자니 두 사람 대화가 마치 선문답 같았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여주쯤 가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청풍 가서 명월은 고사하고 비만 쫄딱 맞고 오는 거 아니냐"며 아우성이었다. 우리는 만종 분기점(남원주)에서 우회전해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날씨가 맑아지기 시작했고 우리 일행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늘도 밝음으로 바뀌었다. 지난번 소백산 갈 때도 이 도로를 이용했지만, 정말 중앙고속도로는 고가도로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산허리를 휘감고 달리는 모노레일 같다고나 할까? 비가 그치자 안개가 저 산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산 위로, 그리고 다시 하늘로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금을 뿌린 듯 온 산을 감싸고 있는 하얀 안개를 보자, 다시 <메밀꽃 필 무렵>이 생각났다. 내가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차는 남제천 나들목을 벗어나 제천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양쪽 길가에 쭉쭉 뻗은 벚나무들은 마치 우리 일행을 환영이라도 한다는 듯 푸르게 웃고 있었다. 아내가 한 마디 했다. "와, 봄에는 벚꽃이 굉장하겠어요?" "그럼요. 4월이면 벚꽃 만개와 함께 제천지역 최대 축제인 '청풍명월제'가 열린답니다. 아까 남제천 나들목에서부터 시작해 우리가 지금 지나고 있는 이 청풍호반길을 따라서 남쪽 방면으로 약 30Km 정도 벚꽃길이 열리지요. 정말 장관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들른 곳은 날카로운 칼봉우리가 첩첩인 금월봉. 기괴한 암석바위가 눈앞에 펼쳐졌다. 금수산 자락에 위치한 금월봉은 바위 생김이 천태만상으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삐죽삐죽 솟은 거대한 바위가 마치 금강산 축소판 같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KBS 드라마 <태조왕건> 촬영장이 있었다. 멀리 호숫가에 띄워진 배와 나루터가 우리를 반겼는데 초가집, 수군 관아, 망루 등 후삼국 시대의 개성 벽란도 포구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얼마 전 끝난 <불멸의 이순신>을 비롯해 <해신> 일부도 이곳에서 촬영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예정이란다(무료 관람/주차료 1000원/문의 043-644-0430).
아침 일찍 떠나와서인지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최형 말로는 이곳 능강리, 학현리, 성내리 등에 유명한 음식점들이 많다고 했다. 주로 송어회와 매운탕을 전문으로 하는 횟집과 토속 음식점이란다. 인근 토속음식점에 들어가 도토리묵과 쌈밥을 든든히 먹고, 청풍대교를 건너니 바로 청풍문화재단지다. 문화재 단지 앞 구릉에서 보는 비취빛 청풍호반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청풍호는 충주 다목적댐 건설로 생성된 호수로 뱃길 130리 중 볼거리가 가장 많고 풍경이 뛰어난 곳으로 내륙의 바다라고 합니다. 작은 민속촌이라 불리는 청풍문화재단지를 정점으로 봉황이 호수 위를 나르는 형상의 비봉산, 어머니 품속과 같이 편안하고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금수산이 어우러진 청풍호반은 가히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지요." 최형의 말에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풍문화재단지는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소재의 청풍호에 자리하고 있다. 충주댐 건설로 생긴 호수는 충주뿐만이 아닌 제천과 단양까지 이어져 있다. 예전에는 충주댐으로 생긴 호수라 하여 ‘충주호’라고 했지만, 제천 사람들은 제천시 청풍면에 있다 하여 '청풍호'라고 부른다.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선사시대 문화의 중심지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됐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 쟁탈지로 찬란한 중원문화를 이루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지방의 중심지로 수운을 이용한 상업과 문물이 크게 발달하고 번성했다. 그러던 청풍이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졌고, 남은 건축 문화재들을 망월산성 기슭으로 모아 오늘의 청풍문화재단지가 되었다.
팔영루를 지나 낮은 언덕을 오르면 가옥 4채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그 앞에서 연자방아가 손님을 맞이한다. 이 집들은 본래 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산리 고가, 후산리 고가, 도하리 고가, 황석리 고가라 부르는데, 집의 구조는 모두 달랐다. 농기구와 살림 도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옛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보물 제546호인 석조여래입상입니다. 청풍면 읍리 대광사 입구에 있던 높이 3.41m의 큰 석불로 얼굴이 통통하여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으로 이마에는 수정이나 보석을 박았던 흔적이 뚜렷하지요. 입상 앞에 둥근 소원돌이 있는데 나이만큼 남자는 오른쪽으로, 여자는 왼쪽으로 돌리면 아들을 갖게 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에 "그럼, 딸을 원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지요?"라고 느닷없이 질문을 했더니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 "그거야 거꾸로 돌리면 되겠네"라고 최형이 대답해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이것은 숙종 7년에 건립한 금병헌(錦屛軒)이라고 하는데 내부에는 청풍관(淸風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금병헌 오른쪽의 응청각(凝淸閣)은 토석으로 아래층 벽을 친 2층 누각입니다. ...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 건물이 바로 청풍문화재단지의 중심 건물인 한벽루(寒碧樓)입니다. 보물 제528호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큰 누각입니다. 우측에 계단식 익랑을 달아서 화려하지요."
한벽루 앞의 잔디광장에는 지석묘, 문인석, 선정비들이 늘어서 있었고, 아래쪽으로는 야생화자연학습장, 청풍향교, SBS촬영장이 보였다. 나루터 쪽으로 유물 전시관과 수몰역사관이 있어 아이들의 현장 교육에 안성맞춤이었다.
청풍호 여행의 백미는 청풍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장회나루로 가는 선상관광이다. 안내 책자를 보니, 유람선이 주말에는 오전 10시부터 6~7회 운행을 한단다. 관광객 인원에 따라 출발이 되기 때문에 정확한 출항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승선료 9000/043-647-4566). 유람선을 타고 20여분 정도 가니 하늘을 찌를 듯한 푸른 대나무 형상의 옥순봉이 눈앞에 다가서고, 옥순봉을 지나자마자 금수산(1016m)이 비단을 둘러놓은 듯한 유려한 자태를 뽐낸다. 그리고 구담봉에 이어 제비봉과 마주쳤다. 숱한 봉우리 사이에 제비 한 마리가 막 나래를 펴는 모습이다. 이어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사인암 등을 돌아보고, 단양나루에서 도담삼봉과 고수동굴까지 구경했다. 사계절 다 아름답지만 그 중에서도 가을 단풍이 절정인 때에 맞춰 청풍호반 유람선 관광을 한다면, 선상관광의 극치를 만끽할 수 있단다. 짙푸른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스쳐 지나가는 청풍호반의 뱃길 여행은 정말 꿈결 같은 추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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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강콘도(CLUB ES)는 청풍호가 보이는 산등성이 작은 마을에 옹기종기 지은, 문화와 예술이 숨쉬는 테마 콘도였다. 아파트형 단일 건물이 아니라 알프스 샬레풍의 단층, 혹은 복층 건물이었다. 호숫가 언덕 위에 작은 집도 있었고, 중세 유럽풍의 고색창연함을 물들여 놓은 듯한 집도 보였다. 때로는 소박하고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다 가고, 때로는 성주처럼 귀족적인 분위기에 한껏 취해 보라는 주인장의 뜻이란다. 우리는 전망이 가장 좋다는 꼭대기 집에 여장을 풀었다. 간단히 씻고 난 후, 우리는 산책에 나섰다. 먼저 '도예방'이 눈에 띄었다. 온가족이 동심으로 돌아가 함께 즐기는, 자유로운 흙놀이 공간이란다. 찰흙과 공작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야외 '아틀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장소 어디서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보란다. 화구는 카페 비노로소에서 대여해 주고 있었다. 방목장에는 토끼와 오리, 닭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고, 사육장에는 사슴과 염소들이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산과 계곡의 품안에서 편안히 쉬다 가라는 '명상의 집'이 보였고, 산책로, 전망대 등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즐기라고 매주말 다양한 문화와 예술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매주 토요일 저녁 7시에는 '야외 뮤직 라이브'가 열린다. 바비큐 뷔페를 앞에 놓고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흥겨운 주말밤을 선사한단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소화도 시킬 겸 다시 산책에 나섰다. 별빛이 총총한 호반의 야경은 또 다른 구경거리였다. 나무로 만든 작은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자 세상이 별천지처럼 달리 보였다. 가로등 가까이 가보니 나방들이 불빛에 달려들고 있었다. 가다가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구마를 구워 먹고 있어 우리도 끼어 노래도 하고 이야기꽃도 피웠다.
그러자 최형이 조금만 기다리면 달이 뜰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티타임을 갖고 있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말 하늘과 호수 속에 달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떨기 연꽃이었다. 송강 정철이 왜 달을 보고 백련화(白蓮花)라 했는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산행을 하는 데는 두 코스가 있었는데, 우리는 제2코스를 통해 정방사까지 다녀왔다. 가는 길에 구절초, 벌개미취, 달맞이꽃 등 여러가지 야생화와 척박한 오솔길에 뿌리를 박고 피어 있는 키작은 코스모스들이 인상적이었다.
점심식사 메뉴는 부대찌개였다. 여자들이 아침을 준비했기에 점심식사는 남자들이 마련했다. 어설픈 음식 솜씨 때문인지, 아침의 참치찌개보다 맛은 덜했지만, 그래도 다들 맛있게 잘 먹었다. 왜 야외로 나오면 식욕이 돋는 걸까? 점심을 먹은 일행은 체크 아웃을 하고 숙소에서 나와,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절한 전설이 서려 있다는, 또한 대중가요 <울고넘는 박달재>의 소재가 되었다는 바로 그 박달재로 향했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틋한 전설의 고개에서 '울고넘는 박달재'를 읊조리듯 불러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위의 나무들도 그런지 모두들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하고 있으며 1866년 병인박해의 첫 순교자인 남종삼이 출생한 지역이란다. 1958년 원주교구장이 진입로를 새롭게 하는 등 성지 일원을 말끔히 정리하고 단장했다. 제천 10경의 하나인 탁사정은 강원도 원주에서 제천을 들어오는 국도 5호선변에 자리하고 있는 제천근교의 유일한 유원지이며 여름 피서철 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이다. 조선 선조 19년(1568)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고향에 돌아올 때 해송 여덟 그루를 가져와 심고 이곳을 팔송이라 명명했고, 그뒤 그의 아들 희운이 정자를 짓고 팔송정이라 했단다. 이후 허물어진 팔송정을 후손 윤근이 다시 세웠고 원규상이 탁사정이라 했다.
탁사정을 끝으로, 오후 4시쯤 서울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 호반길을 좀 더 드라이브했다. 그런데 차를 따라 몸은 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풍에 묶여 있었다. 아마도 앞으로 달이 뜨는 밤이면 이곳 청풍호반이 두고두고 생각날 듯싶다. 우리는 이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서울로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신갈쯤 왔을 때, 서쪽 하늘의 낙조가 장관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보는 낙조도 꽤 볼 만했다. 우리는 낙조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신갈~안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모두들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저 지는 태양을 어젯밤에 보았던 청풍명월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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