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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으로 명월 보러 갈래요

박상규 2009. 7. 11. 14:50

청풍으로 명월 보러 갈래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계절, 가족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마땅한 여행지가 없을까 물색하던 중에 여행 길라잡이 최형이 충북 제천에 있는 청풍호반을 추천하며, 일정이 맞으면 동행하자고 했다.

"청풍명월의 본향인 제천의 청풍이 바로 그런 곳이지요. 수려한 호반과 아름다운 산세, 그리고 맑은 계곡... 소위 3색이 어우러진 정말 좋은 곳이라니까요!"

▲ 청풍에서 만난 가을 1
ⓒ 김형태
▲ 청풍에서 만난 가을 2
ⓒ 김형태
제천이라... 제천이라는 지명을 듣자마자, 불현듯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강원도 봉평에도, 충주댁의 고향인 충주에도 가보았지만, 성 서방네가 산다는 그 제천에는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괜스레 마음까지 설렜다.

"금수산을 배경으로 드넓은 충주호가 펼쳐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킵니다. 눈을 들어 청풍호 주변을 볼 것 같으면 청풍문화재단지, 유람선과 수경분수, 청풍랜드, KBS, SBS 촬영장 등이 있고, 뒤쪽으로는 월악산이 송계계곡, 용하구곡, 탁사정 등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지요."

최형이 여행 전문가라도 되는 양, 약장수처럼 한바탕 연설을 하자, 아내도 솔깃했는지 넋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여보, 우리도 가요?"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 10월 초 우리는 청풍호반으로 여행을 가게 됐다.

"그런데 최형, 청풍에 가면 명월을 볼 수 있기는 한 거요?"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 박형이 같이 가면 틀림없이 볼 수 있을 거외다."

함께 가기로 한 박형의 질문에 대한 최형의 대답이었다. 옆에서 듣자니 두 사람 대화가 마치 선문답 같았다.

드디어 출발하는 날. 영동고속도로를 따라 여주쯤 가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청풍 가서 명월은 고사하고 비만 쫄딱 맞고 오는 거 아니냐"며 아우성이었다. 우리는 만종 분기점(남원주)에서 우회전해 중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날씨가 맑아지기 시작했고 우리 일행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늘도 밝음으로 바뀌었다.

지난번 소백산 갈 때도 이 도로를 이용했지만, 정말 중앙고속도로는 고가도로 같다는 느낌이 든다. 산허리를 휘감고 달리는 모노레일 같다고나 할까? 비가 그치자 안개가 저 산 아래에서부터 서서히 산 위로, 그리고 다시 하늘로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금을 뿌린 듯 온 산을 감싸고 있는 하얀 안개를 보자, 다시 <메밀꽃 필 무렵>이 생각났다. 내가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차는 남제천 나들목을 벗어나 제천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양쪽 길가에 쭉쭉 뻗은 벚나무들은 마치 우리 일행을 환영이라도 한다는 듯 푸르게 웃고 있었다. 아내가 한 마디 했다.

"와, 봄에는 벚꽃이 굉장하겠어요?"
"그럼요. 4월이면 벚꽃 만개와 함께 제천지역 최대 축제인 '청풍명월제'가 열린답니다. 아까 남제천 나들목에서부터 시작해 우리가 지금 지나고 있는 이 청풍호반길을 따라서 남쪽 방면으로 약 30Km 정도 벚꽃길이 열리지요. 정말 장관입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들른 곳은 날카로운 칼봉우리가 첩첩인 금월봉. 기괴한 암석바위가 눈앞에 펼쳐졌다. 금수산 자락에 위치한 금월봉은 바위 생김이 천태만상으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삐죽삐죽 솟은 거대한 바위가 마치 금강산 축소판 같다고 하여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KBS 드라마 <태조왕건> 촬영장이 있었다. 멀리 호숫가에 띄워진 배와 나루터가 우리를 반겼는데 초가집, 수군 관아, 망루 등 후삼국 시대의 개성 벽란도 포구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얼마 전 끝난 <불멸의 이순신>을 비롯해 <해신> 일부도 이곳에서 촬영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사용될 예정이란다(무료 관람/주차료 1000원/문의 043-644-0430).

▲ 망루에서 바라본 KBS 드라마 촬영장. 산 아래에는 아직도 여름처럼 짙푸르다.
ⓒ 김형태
고향 가는 길처럼 구불구불한 호반길을 따라가니 '만남의 광장'이 나오고, 그 아래에는 청풍랜드가 있었다. 최형 말로는 이곳 청풍랜드에는 수상경비행장(043-643-2676)을 비롯해 인공암벽장(043-640-5698)과 번지점프장(043-648-4151)이 있어 레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각광 받고 있다.

아침 일찍 떠나와서인지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최형 말로는 이곳 능강리, 학현리, 성내리 등에 유명한 음식점들이 많다고 했다. 주로 송어회와 매운탕을 전문으로 하는 횟집과 토속 음식점이란다.

인근 토속음식점에 들어가 도토리묵과 쌈밥을 든든히 먹고, 청풍대교를 건너니 바로 청풍문화재단지다. 문화재 단지 앞 구릉에서 보는 비취빛 청풍호반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청풍호는 충주 다목적댐 건설로 생성된 호수로 뱃길 130리 중 볼거리가 가장 많고 풍경이 뛰어난 곳으로 내륙의 바다라고 합니다. 작은 민속촌이라 불리는 청풍문화재단지를 정점으로 봉황이 호수 위를 나르는 형상의 비봉산, 어머니 품속과 같이 편안하고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금수산이 어우러진 청풍호반은 가히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지요."

최형의 말에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풍문화재단지는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소재의 청풍호에 자리하고 있다. 충주댐 건설로 생긴 호수는 충주뿐만이 아닌 제천과 단양까지 이어져 있다. 예전에는 충주댐으로 생긴 호수라 하여 ‘충주호’라고 했지만, 제천 사람들은 제천시 청풍면에 있다 하여 '청풍호'라고 부른다.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선사시대 문화의 중심지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곳곳에서 발견됐으며,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 쟁탈지로 찬란한 중원문화를 이루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지방의 중심지로 수운을 이용한 상업과 문물이 크게 발달하고 번성했다.

그러던 청풍이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졌고, 남은 건축 문화재들을 망월산성 기슭으로 모아 오늘의 청풍문화재단지가 되었다.

청풍문화재단지

관람시간 : 3월~10월 09:00~18:00 / 11월~2월 09:00~17:00

관 람 료 :
개인 - 어른 3000원 / 청소년 2000원 / 어린이 1000원
단체 - 어른 2500원 / 청소년 1500원 / 어린이 800원

문의: 청풍관광개발사업소(043-640-5711~12)
청풍문화재단지 관리사무소(043-640-5711)
작은 민속촌을 연상케 하는 청풍문화재단지 입구의 팔영루(八詠樓)는 청풍부의 관문이다. 민치상 부사가 청풍팔경을 노래한 팔영시가 걸려 있어 '팔영루'라고 부른다.

팔영루를 지나 낮은 언덕을 오르면 가옥 4채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그 앞에서 연자방아가 손님을 맞이한다. 이 집들은 본래 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산리 고가, 후산리 고가, 도하리 고가, 황석리 고가라 부르는데, 집의 구조는 모두 달랐다. 농기구와 살림 도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옛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보물 제546호인 석조여래입상입니다. 청풍면 읍리 대광사 입구에 있던 높이 3.41m의 큰 석불로 얼굴이 통통하여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으로 이마에는 수정이나 보석을 박았던 흔적이 뚜렷하지요. 입상 앞에 둥근 소원돌이 있는데 나이만큼 남자는 오른쪽으로, 여자는 왼쪽으로 돌리면 아들을 갖게 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에 "그럼, 딸을 원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지요?"라고 느닷없이 질문을 했더니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 "그거야 거꾸로 돌리면 되겠네"라고 최형이 대답해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 청풍문화재단지의 중심 건물인 한벽루
ⓒ 김형태
"금남루(錦南樓)는 청풍부 관아의 외삼문으로 2층 누각 형태입니다. 2층 누대는 밖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고, 아래층 가운데 문은 부사 전용이며 양쪽 문은 평민이 출입했답니다. 금남루는 이전하면서 양쪽의 담장이 없어져 정자처럼 쓸쓸해 보입니다. ...

이것은 숙종 7년에 건립한 금병헌(錦屛軒)이라고 하는데 내부에는 청풍관(淸風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금병헌 오른쪽의 응청각(凝淸閣)은 토석으로 아래층 벽을 친 2층 누각입니다. ... 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 건물이 바로 청풍문화재단지의 중심 건물인 한벽루(寒碧樓)입니다. 보물 제528호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큰 누각입니다. 우측에 계단식 익랑을 달아서 화려하지요."

▲ 자연학습장에서 만난 구절초와 꿀벌
ⓒ 김형태
안내원의 좋은 설명에 우리는 힘찬 박수를 보냈다. 우리 아이는 감사의 표시로 시원한 생수 한 병을 안내원에게 선물했다.

한벽루 앞의 잔디광장에는 지석묘, 문인석, 선정비들이 늘어서 있었고, 아래쪽으로는 야생화자연학습장, 청풍향교, SBS촬영장이 보였다. 나루터 쪽으로 유물 전시관과 수몰역사관이 있어 아이들의 현장 교육에 안성맞춤이었다.

▲ 산성을 올라가다가 만난 반가운 벗
ⓒ 김형태
올려다 보니 서북쪽 언덕에 삼국시대에 축조된 망월산성(望月山城)과 팔각정자가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없다며 비지땀을 흘려가며 올라갔더니 문화재단지와 SBS드라마 촬영장, 청풍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 마치 만리장성을 보는 듯한 만월산성
ⓒ 김형태
▲ 소나무 숲 사이에서 용틀임하듯 위용을 드러내는 망월루
ⓒ 김형태
이곳에 앉아 162m까지 뿜어 올리는 청풍호반의 분수쇼를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누각에 오른 우리는 이마의 땀을 바람으로 식혀가며 옛 사람들의 풍류를 떠올려 보았다. 화려한 단청 아래 누대에서 청풍호반을 바라보니 우화등선(羽化登仙)의 기분이었다. 정말 밤에 달이라도 뜨면 그 달 잡으러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청풍호 여행의 백미는 청풍나루에서 유람선을 타고 장회나루로 가는 선상관광이다. 안내 책자를 보니, 유람선이 주말에는 오전 10시부터 6~7회 운행을 한단다. 관광객 인원에 따라 출발이 되기 때문에 정확한 출항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승선료 9000/043-647-4566).

유람선을 타고 20여분 정도 가니 하늘을 찌를 듯한 푸른 대나무 형상의 옥순봉이 눈앞에 다가서고, 옥순봉을 지나자마자 금수산(1016m)이 비단을 둘러놓은 듯한 유려한 자태를 뽐낸다. 그리고 구담봉에 이어 제비봉과 마주쳤다. 숱한 봉우리 사이에 제비 한 마리가 막 나래를 펴는 모습이다.

이어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사인암 등을 돌아보고, 단양나루에서 도담삼봉과 고수동굴까지 구경했다. 사계절 다 아름답지만 그 중에서도 가을 단풍이 절정인 때에 맞춰 청풍호반 유람선 관광을 한다면, 선상관광의 극치를 만끽할 수 있단다. 짙푸른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스쳐 지나가는 청풍호반의 뱃길 여행은 정말 꿈결 같은 추억이었다.

▲ 청풍나루에서 장회나루까지 가는 유람선
ⓒ 김형태

[시] 청풍호반에서
김형태

정신없이 달려가다---
흐르다--- 흐르다-----
잠시 서서
숨죽이고 가만 있어본다.

드디어 물위로 올라서는 나의 얼굴,
그리고 하늘빛 이웃들의 얼굴---

앞만 보고 달려가다---
흐르다--- 흐르다-----
가끔 멈춰 들여다보라

흐르는 물은 스스로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 금수산 단풍! 왜 금수산이라고 했는가 알만 하였다
ⓒ 김형태
호반을 끼고 가던 일행은 우리가 묵을 숙소가 보이자, 터져 나오는 탄성을 감출 수가 없었다. 숲속 여기저기에 앙증맞게 자리잡은 집들이 동화 속 세상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능강콘도(CLUB ES)는 청풍호가 보이는 산등성이 작은 마을에 옹기종기 지은, 문화와 예술이 숨쉬는 테마 콘도였다. 아파트형 단일 건물이 아니라 알프스 샬레풍의 단층, 혹은 복층 건물이었다.

호숫가 언덕 위에 작은 집도 있었고, 중세 유럽풍의 고색창연함을 물들여 놓은 듯한 집도 보였다. 때로는 소박하고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다 가고, 때로는 성주처럼 귀족적인 분위기에 한껏 취해 보라는 주인장의 뜻이란다. 우리는 전망이 가장 좋다는 꼭대기 집에 여장을 풀었다.

간단히 씻고 난 후, 우리는 산책에 나섰다. 먼저 '도예방'이 눈에 띄었다. 온가족이 동심으로 돌아가 함께 즐기는, 자유로운 흙놀이 공간이란다. 찰흙과 공작도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야외 '아틀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장소 어디서나 아름다운 풍경을 그려 보란다. 화구는 카페 비노로소에서 대여해 주고 있었다. 방목장에는 토끼와 오리, 닭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고, 사육장에는 사슴과 염소들이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산과 계곡의 품안에서 편안히 쉬다 가라는 '명상의 집'이 보였고, 산책로, 전망대 등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즐기라고 매주말 다양한 문화와 예술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매주 토요일 저녁 7시에는 '야외 뮤직 라이브'가 열린다. 바비큐 뷔페를 앞에 놓고 다양한 장르의 뮤지션들이 흥겨운 주말밤을 선사한단다.

▲ 산림욕을 할 수 있는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시(詩)가 소박한 모습으로 반긴다.
ⓒ 김형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1시간 가량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 얼마나 맛있는지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는 말은 아마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소화도 시킬 겸 다시 산책에 나섰다. 별빛이 총총한 호반의 야경은 또 다른 구경거리였다. 나무로 만든 작은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자 세상이 별천지처럼 달리 보였다. 가로등 가까이 가보니 나방들이 불빛에 달려들고 있었다. 가다가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고구마를 구워 먹고 있어 우리도 끼어 노래도 하고 이야기꽃도 피웠다.

▲ 청풍호반에서 보는 낙조
ⓒ 김형태
사람들을 따라 영화를 볼까 하다가, 누가 가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일행은 자연스럽게 호수를 볼 수 있는 전망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수에는 달이 뜨지 않았다. 잔뜩 기대했던 박형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최형이 조금만 기다리면 달이 뜰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티타임을 갖고 있었는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말 하늘과 호수 속에 달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떨기 연꽃이었다. 송강 정철이 왜 달을 보고 백련화(白蓮花)라 했는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풍명월은 차라리 한 떨기 연꽃이었다.
ⓒ 김형태
다음날, 우리는 참치찌개로 아침 식사를 하고, 비교적 이른 시간에 금수산 등반에 나섰다. 듣자 하니, 이곳 제천은 허영호, 최종렬 등 세계적인 산악인을 배출한 산악의 고장이란다.

그 이름 금수산

금수산은 제천시 수산면과 단양군 적성면의 경계를 이루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해발1016m의 명산이다. 월악산 국립공원 최북단에 위치하여 산 이름이 그러하듯 가을이면 비단에 수를 놓은 듯 고운 단풍과 산세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용담폭포(30m), 선녀탕, 한여름 삼복더위에 얼음을 볼 수 있는 한양지(얼음골)에서 발원하여 능강리를 거쳐 청풍호로 흘러드는 능강계곡의 절경 9곳, 그리고 망덕봉, 신선봉, 미인봉, 동산, 까치성산 등은 기암과 절경으로 등산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매년 금수산 전국산악마라톤대회가 개최되어 전국에서 많은 산악인들이 찾는다.

금수산을 바짝 끼고 청풍호반의 푸른 물이 감싸고 돌기 때문에 주변경관 또한 일품이다. 정말 청풍호반을 발 아래 굽어보는 금수산 산행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 속에 빠져든 것을 연상케 할 만큼 산행이 묘미를 더해 준다.

용담폭포와 선녀탕, 얼음골 등 갖가지 기경이 많아 산행의 진수를 맛보게 하며, 울울창창한 노송이 있어 장관을 더한다. 특히 정상에서 바라보는 그림 같은 파노라마에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백운산’이었다. 조선조 중엽 단양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 선생께서 너무도 아름다운 가을경치에 감탄하여 ‘금수산’으로 개명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금수산 정상부의 원경은 길게 누운 임산부의 모습인가 하면 사자머리 형상 같기도 하고 남쪽 능선에서는 뽀족봉으로 보이는 등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보인다. 봄의 철쭉과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 등으로 계절에 따라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산행을 하는 데는 두 코스가 있었는데, 우리는 제2코스를 통해 정방사까지 다녀왔다. 가는 길에 구절초, 벌개미취, 달맞이꽃 등 여러가지 야생화와 척박한 오솔길에 뿌리를 박고 피어 있는 키작은 코스모스들이 인상적이었다.

▲ 쑥부쟁이와 달맞이꽃.
ⓒ 김형태

▲ 산행길에서 만난 가을 벗, 갈꽃 
ⓒ 김형태
또한 차고 맑은 계곡수가 흐르는 물길 곳곳에는 천하절경(쌍벽담, 몽유담, 와룡도, 관주폭, 춘주폭, 금병담, 연자탑, 탈당암, 취적대)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능강구곡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능강계곡물은 정말 유리알처럼 투명했다. 쉬리는 물론 일급수에서만 산다는 버들치, 열목어까지도 보였다.

점심식사 메뉴는 부대찌개였다. 여자들이 아침을 준비했기에 점심식사는 남자들이 마련했다. 어설픈 음식 솜씨 때문인지, 아침의 참치찌개보다 맛은 덜했지만, 그래도 다들 맛있게 잘 먹었다. 왜 야외로 나오면 식욕이 돋는 걸까?

점심을 먹은 일행은 체크 아웃을 하고 숙소에서 나와,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절한 전설이 서려 있다는, 또한 대중가요 <울고넘는 박달재>의 소재가 되었다는 바로 그 박달재로 향했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애틋한 전설의 고개에서 '울고넘는 박달재'를 읊조리듯 불러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위의 나무들도 그런지 모두들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박달재 전설

옛날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금봉은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인 모양이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이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단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詩)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 이슬을 맺는데 /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자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


ⓒ 김형태

▲ 애절한 사연에 자연도 빨갛게 물들고...
ⓒ 김형태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옮겼다.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이 배론 산골로 숨어 들어 살았는데, 그들은 옹기장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 김형태
이곳은 황사영이 토굴속에 숨어 당시의 박해 상황과 천주교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집필한 곳으로, 1855~1866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신학교가 소재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유학생이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의 분묘가 소재하고 있으며 1866년 병인박해의 첫 순교자인 남종삼이 출생한 지역이란다. 1958년 원주교구장이 진입로를 새롭게 하는 등 성지 일원을 말끔히 정리하고 단장했다.

제천 10경의 하나인 탁사정은 강원도 원주에서 제천을 들어오는 국도 5호선변에 자리하고 있는 제천근교의 유일한 유원지이며 여름 피서철 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이다.

조선 선조 19년(1568) 제주 수사로 있던 임응룡이 고향에 돌아올 때 해송 여덟 그루를 가져와 심고 이곳을 팔송이라 명명했고, 그뒤 그의 아들 희운이 정자를 짓고 팔송정이라 했단다. 이후 허물어진 팔송정을 후손 윤근이 다시 세웠고 원규상이 탁사정이라 했다.

ⓒ 김형태
그러나 안타깝게도 팔송은 모두 죽고 지금은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의 해송은 1999년도 10월 팔송마을과 제방둑에 심은 것이다. 그리고 제천 10경의 탁사정은 정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자 주위의 절경을 말한다. 탁사정에 오르니, 선인들의 풍류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탁사정을 끝으로, 오후 4시쯤 서울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 호반길을 좀 더 드라이브했다. 그런데 차를 따라 몸은 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풍에 묶여 있었다. 아마도 앞으로 달이 뜨는 밤이면 이곳 청풍호반이 두고두고 생각날 듯싶다.

우리는 이렇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여 서울로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신갈쯤 왔을 때, 서쪽 하늘의 낙조가 장관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보는 낙조도 꽤 볼 만했다. 우리는 낙조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어, 신갈~안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다.

모두들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저 지는 태양을 어젯밤에 보았던 청풍명월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 지는 해가 마치 청풍에서 본 핏빛 담쟁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