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모든것

끝없는 월악산 계단, 하늘까지 뚫렸으면

박상규 2009. 7. 11. 18:28

끝없는 월악산 계단, 하늘까지 뚫렸으면...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에서.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린다 하여 '월악'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다.
지난 10일 나와 첫 인연을 맺은 산악회인 '경남 산사랑회' 사람들과 함께 월악산(1097m, 충북 제천시) 산행을 떠났다. '처음'이란 말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처음이라서 신선하게 와 닿는 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애틋한 그리움이 되어 늘 마음 한 자락에 머물게 된다.

오전 7시 30분에 마산을 떠난 우리 일행은 10시 40분께 제천시 한수면 덕주골로 해서 산행을 시작했다. 덕주산성 동문을 지나 한참 걸어가면
덕주사 마애불(보물 제406호)이 나온다. 마의태자의 누이인 덕주공주가 세웠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덕주사의 동쪽 암벽에 높이 13m의 마애불(磨崖佛)이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 덕주사 마애불.
첫눈에 기다란 눈, 큼직한 코, 축 늘어진 턱 등 살찐 얼굴이 인상적이다. 그런 식으로 얼굴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은 고려 시대의 거대한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드라지게 조각한 얼굴 부분과 달리 몸은 선(線)으로 새겨져 입체감이 없었다.

신라의 마지막 공주인 덕주공주의 이야기가 오버랩되면서 한순간 처연해졌지만 묘한 감동을 주던 그 마애불 앞에서 나는 이 세상의 복(福)을 간절히 빌고 싶었다.

▲ 월악산의 첫인상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이다. 그만큼 산세가 험하다는 말이다.
▲ 쌍둥이처럼 두 개가 나란히 뻗어 있다 어느 지점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정겨운 철계단에서.
월악산의 첫인상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이다. 그만큼 산세가 험하다는 말이다. 돌계단, 나무계단, 철계단 등 여러 형태의 계단들이 나를 지치게 했다. 여느 때에는 산행을 하다 생각지 못한 계단이 불쑥 나타나면 이상할 정도로 신이 났다. 아마 계단 너머 펼쳐질 경치에 대한 은근한 기대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월악산은 계단 위로 또 다른 계단이 턱 버티고 있는 듯해서 마냥 힘들기만 했다.

이제 와서 하늘 소식이라도 좀 듣게 하늘로 뚫린 계단은 없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본다. 동요를 부르는 '철부지'의 멤버였던 남기용 선생에 이어 월악산 산행 그 다음 날인 11일에 정규화 시인도 우리 곁을 떠나갔다. 한 생애가 너무 힘들고 짧다고 하던 그가 자신의 방에서 홀로 쓰러져 이 세상과 작별을 했다. 무엇보다 그 시인의 죽음이 외롭고 쓸쓸해서 가슴이 아프다.

▲ 바위 틈으로 아름다운 산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내 마음에 정겨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월악산의 계단들도 있다. 하얀 산목련을 볼 수 있었던 계단, 그리고 나란히 뻗어 있다 어느 지점에서 하나로 연결되던 철계단이다. 나는 쌍둥이 철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어머니 나이가 마흔넷이었다. 아버지에게 마음으로 많이 의지하고 살아왔는지 어머니는 몹시 외로워하셨다. 장미 한 송이가 예뻐 꽃병에 꽂아 두면 어머니는 너무 외롭게 보인다며 그 옆에 한 송이를 더 꽂아 놓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 부부로 같이 늙어 간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일 것이다. 부부의 묵묵한 동행을 읊은 오창렬 시인의 '부부'라는 시를 내가 좋아하는 이유도 그 함께 하는 시간 때문이다. 그 시는 마치 내외하듯 서로 떨어져 걷기만 하던 시골 부부가 멀리 언덕을 넘어가자 소실점 가까이 한 점이 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풍경을 멋들어지게 그리고 있다.

▲ 우뚝 솟아 있는 영봉을 보자 벌써 내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 월악산 영봉 정상.
헬기장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1시께. 눈앞에 월악산의 주봉인 영봉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에 벌써 내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마음은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영봉 정상에 이르는데 1시간 남짓 걸렸다. 달이 뜨면 영봉에 걸린다 하여 월악(月岳)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두 개의 바위 봉우리로 되어 있는 영봉에 서면 멀리 충주호가 보이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나는 정상 근처에서 도시락을 꺼내 허겁지겁 먹고 중봉과 하봉을 거쳐 하산을 서둘렀다. 이따금 충주호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며 걷고 또 걸었다. 나는 하산길에 보덕암에 들렀다. 뙤약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그 절집 기와지붕에 노란 꽃들이 피어 있었다.

▲ 하산길에서. 충주호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 보덕암의 맑은 목탁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그곳 지방에 오랫동안 날이 가물었다고 하는데도 저토록 예쁘게 피어 있다니 그저 놀랍기만 했다. 보덕암 스님 말씀대로 참으로 독한 꽃이다. 그래서 더욱더 아름답다. 물줄기의 리듬을 타며 맑은 소리를 내던 보덕암의 목탁 또한 인상적이다. 보덕암 앞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복을 비는 스님의 마음 소리이리라.

나는 바람이고 싶었다


광활한 들녘에서 저문 숲을 만나


숲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나는 구름이고 싶었다


무한 천공의 하늘에서 겨울을 만나면


색깔도 냄새도 하얀


눈으로만 내리고 싶었다


나는 복사꽃이고 싶었다


연분홍 꽃잎으로


그대 손톱 꽃물 들이고 싶었다


아, 지울 수 없는 언약이고 싶었다


나는 불이고 싶었다


아직도 불이 되길 망설이는 그대여


불이 되지 못하고 타 버린 날들이


재가 되었다


마침내 나는 꺼지지 않는 불이 되어


재에 남아 있는 온기까지 태우고 싶었다


(정규화의 '바람 구름 복사꽃 불')



6시간 반 남짓 걸었던 월악산 산행. 이따금 힘든 산행을 왜 굳이 하는지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한다. 재에 남아 있는 온기까지 태우고 하늘로 돌아간 정규화 시인. 그곳에서는 신명이 나는 일만 그에게 생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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