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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도는 해안선 길이가 5㎞에 이르는 작은 섬이다. 충남 서산에서 16㎞ 해상에 있는 섬이다. 55가구에 주민 180여명이 살고 있는 웅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곰이 웅크리고 있는 모양새라고 해서 그리 부른다. 지도상에서 이 섬을 눈여겨보면 물개가 휘어가는 모습을 닮기도 했다. 이런 섬은 진도, 완도, 신안, 그리고 영흥도 측도 어촌마을과 간월도 등에 달린 작은 섬마을 풍경이기도 하다.
웅도에는 조선시대 문신 김자점이 귀향길에 머물렀다는 섬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웅도리’라는 고유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해마다 섬에서 시인학교 캠프를 열고 있어 답사차 이 섬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첫 걸음부터 쉽게 빗장을 열어주지 않았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렀건만 시내버스는 종점인 탓에 나그네를 떨어 뜨려주고 ‘부웅’ 연기만 뿜어대며 사라졌다. 저만치 웅도는 이방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새들만 허공에 날리며 한들한들 바람 소리에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버림받은 나뭇가지와 쓰레기도 때로는 누군가를 위한 따뜻한 군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타산지석이 아니라 타산지목이었다. 인근 마을에서 온 강태공들도 손바닥을 부비기 시작했다. 길 위에서 우리는 그렇게 하나가 되었다. 이윽고 물이 빠져나가자 우리는 불을 끄고 마을로 가는 길에 동행인이 되었다.
썰물 때는 돌김, 바지락, 굴, 새조개 등을 채취한다. 마을 길 초입은 소나무 등이 우거진 숲길이었다. 틈틈이 억새들이 휘날렸다. 잘 가꾸어 놓은 정원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언덕배기에 오르자 저 편 태안반도가 보였다.
관공서라고는 해양경찰지서와 분교뿐이었다. 이도 어느 집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집에 문패만 달고 있을 정도였다. 학교는 서울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어린이집 같은 작은 공간이었다. 언덕배기를 그렇게 넘어서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집집마다 모두 소와 달구지를 끌고 나오는 중이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시작된 달구지 행렬은 그렇게 바닷길로 이어졌다. 바닷길 저 편에는 고파도, 조도 등 작은 섬이 웅도와 마주보고 서있었다. 모두들 자가용 삼아 타고 내려갔다. 한 할아버지가 이방인에게도 함께 타고가자고 손짓했다. 훈훈하고 넉넉한 인심이 그대로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아낙네들이 멀리 바다에서 조개를 잡아 삼태기에 담고 들고 뭍으로 나오면 남정네들은 지게에 옮겨지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 그러던 어느 날 노동력을 줄여 보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소달구지를 몰고 직접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었단다. 그러니 달구지 바퀴가 빠지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집집마다 농사를 병행하던 터라 소와 달구지는 이 마을 사람들의 재산목록 1호였다. 그만큼 소중하면서도 대중적이고 보편적 동네 수단이었다.
문제는 소가 바닷길을 제대로 갔다가 오는가 하는 문제였다. 소는 밭갈이를 할 때 가던 길을 다시 되돌아오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도 다행히 바다에서도 이 일을 훌륭히 해냈다. 사람들이 장화를 신고도 푹, 푹 빠진 개펄을 소는 성큼성큼 잘도 갔다. 마을 사람들은 이후에 더 빠르고 효율적인 운반 수단을 생각하다가 달구지 대신 경운기와 트랙터를 몰고 들어가기도 했지만 짠물에 기계가 부식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국 최상의 운송 수단은 소달구지뿐이었다는 것이다. 시골 사람들이 집짐승들을 가족 이상으로 사랑하게 된 이유도 이렇게 자연 환경에 맞춰 살아가는 자연주의 심성과 휴머니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대량생산과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네 삶을 찬찬히 뒤돌아보게 하는 농어촌 문화이기도 하다. 공동체 문화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져지게 된 것도 순전 소달구지 덕분이었다. 바다에서 바지락을 캐던 주민들은 공동 양식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바지락 도매상이 물량을 주문하면 집집마다 할당된 양을 공동 양식장에서 캐어서 공동으로 팔고 수입을 균등하게 배분한다. 그 때마다 이 기금으로 단합대회도 하고 돼지고기 추렴도 한다. 명절 때는 어른들의 장수를 빌어주고 외지에서 고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웅도만의 작은 축제도 연다.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가 웅도의 저력이자 삶의 신화 하루 4시간 정도 일제히 채취에 몰두한다. 그렇게 잡은 양은 6t 정도인데 계절마다 가격대가 다르긴 하지만 평균 시가로 800만원 정도를 벌어들인다. 이를 다시 가구별로 나누면 20만원 안팎의 수입이 되돌아온다. 적은 수입은 아니지 않는가? 그 바탕에 공동체 문화의 위력과 저력이 깔려 있다. 깊은 개흙 속에서 캐낸 낙지는 잡은 즉시 대기 중인 산지 중간상인들에게 높은 값으로 팔게 된다. 여행객들도 이곳에서 싸게 사서 민박집에 부탁하면 연포탕으로 삶아준다. 물론 사지 않더라도 20분 거리에 있는 서산으로 나가면 식당가에서는 맛좋은 연포탕 요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작은 섬마을이지만 가난한 티가 없어 좋아 보였다. 전통적인 어촌마을의 공동체 문화를 지키면서도 외지인에게 쉽게 가슴을 열어주는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해안가에서 마을을 올려다보니 웅도는 솔숲으로 병풍을 치고 있는 어촌이었다. 한적하기 그지없는 섬마을은 그렇게 장골마을 , 큰골마을, 큰 마을, 동편마을 등 네 마을로 군락을 이루어 그림 같이 살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씩 바닷길이 열리는 웅도는 관광을 주업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래서 민박집이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원시 바다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웅도로 들어갈 때는 이런 환경의 특징을 숙지하고 서산 대산읍에서 숙소를 정한 후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물이 먼 바다로 나가 있는 시간대는 6시간 정도임으로 물이 차오르기 전에 섬을 빠져 나와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철학의 어머니라는 그 한가로움을 마음껏 만끽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참으로 정겨운 어촌, 다정한 섬사람들과의 짧고 깊은 만남이었다.
웅도 여행은 그렇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불현듯 노자의 일갈이 떠올랐다. 서슴지 않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듭 덕을 쌓는 것이다. 거듭 덕을 쌓으면 극복하지 못할 게 없으며, 극복하지 못할 게 없으면 극단적으로 달릴 줄 모르고, 극단적으로 달리지 않으면 나라가 일어선다.” 스르르, 스르르 물결이 미끄러지고 있었다. 서서히 길이 지워져 갔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동서로 갈려 이별의 시간을 가졌던 바다 물길이 이윽고 하나가 되어 철썩철썩 파도치고 있었다.
한 물결로 출렁이는 저 바다에 노을빛이 젖어든다. 웅도의 억새들이 하루의 이별을 손 흔들고 서 있었고, 태안반도 쪽으로 마지막 불꽃을 튀기는 노을 바다에 하얀 갈매기들이 물수제비를 뜨고 있었다. 이내 허공으로 포물선을 그어가는 새들을 보고 있노라니, 머리 위로 ‘사랑해요’라는 하트 모양을 긋는 형상이다. 산다는 것은 둥글둥글 지구처럼 그렇게 함께 젖어 저물어 가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하듯이 말이다.
낙지는 돌 틈과 깊숙한 개흙에서 살기 때문에 남해안 완도, 신안, 서해안 태안반도 등 개흙이 많은 곳에서 주로 잡힌다. 낙지는 몸통과 팔 사이에 있는 머리에 뇌가 있으며 좌우 두 눈이 붙어 있다. 1∼2줄의 빨판(흡착기)이 있어 갯바위에 붙기도 하고 이를 무기로 작은 조개류를 잡아먹는다. 산란기에 팔 안쪽에서 알을 낳는다. 입은 팔 가운데 붙어 있다. 산란기는 봄철이고 낚시꾼들은 주낙의 미끼로 사용하기도 하고 무침, 전골, 볶음, 연포탕 등 먹을거리로 사랑받고 있다. 이를 ‘수루데’, ‘쓰레미’, ‘쓰르메’, ‘쓰리미’ 등으로 불렀다. 일종의 낙지에 대한 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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