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摩尼山 469.4m)은 마리산(摩利山), 마루산,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京畿灣)과 영종도(永宗島)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정에는 단군 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사적 136호)이 있는데, 태백산(太白山 1,567m)의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자료228호)과 더불어 민족의 영산이며, 이 곳에서는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를 올리고 있다. 전국체전이 열릴때면 이곳에서 성화를 채화하여 개최지로 봉송된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종휘(李種徽)가 지은 [수산집 修山集]에 "참성단의 높이가 5m가 넘으며, 상단이 사방 2m, 하단이 지름 4.5m인 상방하원형(上方下圓形)으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여러 차례 개축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산 정상의 북동쪽 5㎞ 지점에 있는 정족산(鼎足山)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사적 130)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남서쪽 기슭에는 정수사법당(淨水寺法堂:보물 161)이 있고, 북서쪽 해안에는 장곶돈대(長串敦臺:인천기념물 29) 1기(基)가 있다. 1977년 3월 산 일대가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으며, 산세가 아기자기하고 주변에 문화유적지가 많아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찾고 있다.
현지에서는 마니산이라 하지 않고 머리를 뜻하는 마리산이라 부른다. 강화도는 한강하구에 위치하여 고려조는 물론 조선조에서도 국토의 핵심인 중부지역을 옹위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중요한 섬이다. 지도를 보면 강화도의 위치는 강화도가 없었더라면 해외로부터의 한강하구에의 접근은 훨씬 쉬어져 그로 인한 역사변경의 가능성도 추론해볼 수 있는 위치임을 알 수 있다. 길은 그동안 정비와 확장을 거듭하여 쉬원하게 뚫려 다녀오기가 아주 쉬워졌다. 마리산으로 가려면 강화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3.6킬로미터정도 밑으로 내려가다가 강화도로 가는전등사길과는 다른 방향인 우측 즉 보문사방향으로 들어가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등산로는 비교적 단순하여 길찾기가 용이한 것이 특징이다. 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산이기 때문이다. 등산 깃점은 북쪽인 상방리와 남쪽의 정수사와 함허동천이다. 참성단이 가까운 북쪽 상방리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쪽이 국민관광지역으로 정비되어 각종 시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참성단까지의 산행시간은 대충 50분 내지 1시간정도가 걸린다. 산등성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숲으로 덮여있어 무더운 한 여름에도 산행이 가능하다. 마니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대부분이 돌계단이어서 올라가기가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다. 주차장이 있는 입구에서 10분쯤 올라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길다란 표주박을 막대끝에 달아 떠올린 생수는 맛도 좋고 시원해서 여름엔 그저그만이다. 이곳에서 물을 확보해두지 않으면 물을 구할 방법이 없으므로 물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오르막길의 수림은 특별한 게 없다. 아래쪽은 조림해서 잣나무와 단풍나무도 보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굴참나무류의 단순한 수림이 이어진다. 정상에 접근하면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참성단을 쌓은 외곽적석옹벽이다. 옹벽사이로 난 틈새로 올라가면 참성단이다. 참성단은 정상은 아니지만 마리산에 와서 참성단에만 올라도 마리산에 갔다왔다고 말한다. 참성단은 오래전 허물어져 방치되어 오다 조선조말 한 관리에 의해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화유수로 부임된 최석항이라는 사람이 1716년에 중수한 것이다. 우리것 보존문제에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식견이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조선조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낸 성스러운 곳을 허물어진 채로 후세인에 남겨둘 수 없다하여 재구축하여 오늘의 참성단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다. 정말 현명한 선조이시다. 이에 관한 명문(돌에 새긴 글)은 정상으로 가는 길에 나오는 헬기장 바로 아래에 있는 바위면석에 새겨져 있다.
마리산의 북쪽 봉우리자체가 외곽을 돌로 쌓은 채 모두가 참성단 영역이 되어있다. 참성단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특히 맑은날) 이곳이 한반도의 주변이 아니라 처음이자, 시작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옴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선 서남쪽이 대양으로 완전히 뚫려있어서 참성단의 위치가 진취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고 그 이외에는 더러는 군소산악, 더러는 운하와 같은 해협, 섬과 섬사이의 물줄기가 이리저리 달리고 있지만 먼 주변으로 눈을 돌리면 마리산을 중심에 두고 빙 둘러가며 긴 산맥들이 거대한 성채를 이룬 듯 둘러싸고 있는 기막힌 입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성단에서 정상까지 거리는 1.2킬로미터정도. 정상까지의 암릉이 하얗게 강열한 햇살에 드러나고 있다. 이 암릉의 바위들은 거석들이 너덜을 이룬듯한 못습으로 치마바위형의 암릉과는 거리가 있는 능선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남으로 내려가면 우선 헬기장이 나온다. 헬기장에서 내려가면 숲속에 최석항이 참성단을 중수했다는 내력을 새긴 글씨가 있는 바위가 나온다. 숲속을 빠져나오면 암릉이 시작된다. 특별히 어려운 곳은 없으나 주의해야 할 곳은 있다. 암릉 중간 부분에 붉은 페인트로 화살을 그은 곳이 나오는데 X표를 한 곳으로 무심코 내려가다가는 벼랑 끝에 서게 된다. 이 부근에서 사고가 있었음을 증언해주는 조그마한 석비가 바위틈에 설치되어 있다.
큰 바위들을 오르내리면서 시선을 좌우로 돌리면 강화도의 바닷가를 시원스레 조망할 수 있다. 큰 바위아래를 내려다보면 운이 좋을 경우엔 높은 벼랑사이에 난의 일종인 노랑 상사화가 피어있는 것을 볼 때도 있다. 내리막을 이루던 암릉은 오르막이 되는 암릉을 고수하려면 암벽타기에 어느정도 통달한 사람이어야 하므로 바위아래로 난 숲속길 우회로로 가는 게 좋다. 정상 남쪽 암릉의 갈림길. 멀리 보이는 물길이 강화해협이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은 참성단보다 4미터 정도 높을까 말까 하므로 그게 그것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참성단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의 묘미는 마리산 산행을 사이다맛처럼 시원하게 해주는 대목이므로 산행을 위하여 마리산을 찾았다면 당연히 빼먹어서는 안된다.
정상에서 정수사쪽을 바라보면 암릉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떡을 포갠 듯한 바위위에 소나무가 서 있는 그림같은 풍경도 보이고 암릉 남서쪽의 간척지로 일군듯한 꽤 넓은 들판도 보인다. 동막리 앞쪽 바다에는 각시바위도 있다는데 그 바위를 포착하기는 어렵다. (정수사에서 도를 닦던 함허대사의 아내가 찾아왔으나 대사가 끝내 만나주지 앉자 바다에 빠져죽어 각시바위가 되었다고 한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을 끄는 것은 초지진남쪽에서 북쪽끝의 서장곡돈대에 이르는 약 18킬로미터의 운하와 같은 해협이다.
이 해협은 양요때 미국의 군함들이 치고 올라오며 통과했던 바로 그 해협이다. 이곳 강화도 해안을 따라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오두돈대, 용골돈대, 용진돈대, 더러미돈대, 갈곶돈대 당산돈대, 서장곡돈대등이 집중적으로 들어서 있는 것은 다 그 때문이다. 지금은 장마철 뒤끝이라 한강물이 넘어와 황토물 처럼 붉다. 그러나 1871년 미국함대가 저 수로를 따라 거슬러 올라왔을 때도 물빛은 보통빛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군은 5척의 군함으로 해협으로 다가서며 남동쪽으로 보이는 저 좁은 수로를 측량하려고 광성보앞으로 척후대를 보냈다. 이때 광성보에서 일제사격을 가한다. 미국은 본대를 이끌고 응전하는 한편 초지진과 광성보 2킬로쯤 아래쪽에 있는 덕진진을 점령한다.
이들은 광성보를 본격공격하고 우리도 반격,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역사는 이틀간의 공방전 끝에 천하의 미국이 격퇴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당시의 우리군이 경험했던 환희는 어떤 것이었을까? 단지 그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한여름 이 능선길의 햇볕은 강열하다. 될 수 있는대로 긴소매 셔츠를 입는 것이 좋다. 숲이 나오면 숲속바람에 더위를 식힌 뒤 산행하도록 한다.정상에서 암릉을 따라 남동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갈림길이 나온다. 정수사는 오른쪽, 함허대사가 참선하며 '함허동천'이라는 글을 새긴 함허동천은 왼쪽길이다. 정수사는 보물 161호로 지정된 정수사법당(대웅전)이 있는 울창한 숲속의 한적한 절이고 함허동천에는 200미터 와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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