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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1박2일> '유선관'편이 방송된 후 <1박2일>게시판은 유선관의 위치과 숙박방법을 묻는 질문들이 한동안 쇄도했었다고 합니다. 방송을 통해 소개된 유선관 역시 갑작스런 유명세 덕(?)에 밀려드는 손님들로 한동안 애를 먹었다는 후문도 들립니다.
저 역시 유선관을 보면서 저렇게 운치 있고 품위 있는 고택에서 하룻밤을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바람을 가졌었지요. 그런 제 바람은 몇 달 후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인터넷을 인연으로 친구가 된 열 명의 아줌마들이 일년에 한번씩 모여 전국의 볼만한 곳, 놀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테마 여행을 하고 있는데 올해는 전주 한옥마을에서 '1박2일' 한옥체험을 하기로 한 때문이지요.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 50분 정도가 걸리는 전주. 한옥마을은 전주시 완산구 교동, 풍남동 일대로 전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택시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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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잘 정돈된 골목 양옆으로 나지막한 한옥 기와지붕이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정겹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영정이 모셔진 경기전 앞 태조로를 따라 오목대를 향해 걷다 보면 조금씩, 조금씩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향하는 듯 착각이 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가 하루 묵어가기로 한 한옥은 수원 백씨 백낙중의 고택 '학인당'입니다. 1908년에 지어진 학인당은 대지 2000평에 99칸짜리 저택이었으나 지금은 520평 대지에 안채, 사랑채, 뒷채, 별당채 정도가 보존 되고 있습니다.
주인의 말을 빌리자면 학인당은 조선왕조 붕괴 후 궁궐건축 양식이 도입되어 지어진 대표적인 민가로 압록강과 오대산 등지에서 구한 금강송을 재료로 왕실의 궁궐을 건축하던 도편수들의 손에 지어져 전라북도 지정 민속자료로 지정된 집이기도 합니다.
위엄 있는 솟을대문이 타지에서 빈방을 청해 드는 객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솟을 대문 위에 걸린 '효자승훈랑영릉참봉수원백낙중지려'라는 현액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고종황제가 이집의 주인이었던 백낙중의 효심을 높이 사 중인이었던 그에게 승훈랑이라는 벼슬을 주어 치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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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잘 가꾸어진 정원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소나무와 돌, 꽃과 작은 연못이 잘 조화된 작은 정원은 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안채와 더불어 한옥의 정취를 한껏 높여줍니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들이 묵으실 방은 별채로 '진수헌'입니다. 편안히 주무시고 좋은 추억 만드세요."
먼곳에서 온 객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중년의 여인은 학인당의 안주인. 저택이라 불러도 손색 없을 것 같은 100년 고택의 안주인이지만 그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이 이웃의 아줌마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한지문을 열고 마루에 오르니 노랗게 기름을 먹인 종이장판이 반들반들한 구들방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후원을 향해 낸 누마루는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도록 찻상이 준비되어 있고 혹시나 지루하지 않을까 마루 끝엔 장기판과 윷까지 마련해 두었습니다.
한옥 방에는 장이 없는 대신 다락이 있었습니다. 가져온 짐들을 다락에 올려놓으며 모두들 어린 시절 다락에 대한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 놓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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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에 강정이랑 곶감이랑 넣어 두고 꺼내 주던 엄마 생각난다."
"어릴 때 난 다락에 잘 숨었어. 다락에 숨는다고 올라가 잠이 드는 바람에 엄마랑 언니, 오빠들이 동네방네 찾으러 다니고... 하하하."
"맞아. 나도 술래잡기 하면 꼭 다락에 숨었다."
옛날이야기와 함께 짐을 푼 우리는 시원한 마루바닥에 등을 대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한옥마을 순례를 떠납니다.
전주 한옥마을은 1930년대를 전후해 전주에서 일어난 일본인들의 마구잡이식 건축과 세력 확장에 반발해 낙향한 선비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한옥을 지음으로서 생겨난 일본식 건물 속의 한옥촌이었다고 합니다.
총 700여 채의 한옥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한옥마을은 총 면적 25만 평방미터 정도로 중간 중간 차를 마시거나, 눈요기를 하면서 느린 걸음으로 둘러보아도 두 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 아담한 규모의 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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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기와 그리고 흙으로 지어진 한옥집 사이사이엔 전주 전통공예품을 파는 예쁜 상점들이 즐비하고 아주 오래 전에 내었을 조붓한 골목길을 돌아 들어가면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전주한정식을 맛볼 수 있는 토속 음식점들도 숨어 있습니다.
푸짐함도 그만, 맛도 그만, 정갈함도 그만인 전주 한정식으로 배를 불리고 숙소인 학인당으로 돌아오니 백옥같이 빨아 보송 보송 말린 희고 고운 이부자리가 눕기를 청합니다.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교교한 달빛을 조명삼아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은 잠에 빠져 드니 조선시대 살았던 이 집안 아낙의 꿈이라도 꿀 듯합니다.
다음날. 학인당의 안주인은 우리를 안채로 부릅니다. 멀리서 온 손님들이니 당신의 시할아버님이 쓰시던 방과 할머니가 쓰시던 다락을 보여주겠답니다.
안채의 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드니 보통 집으로 치자면 2층 높이는 됨직한 높다란 천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우리가락을 즐기셨어요. 일제강점기 그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유명 소리꾼들을 불러 소리판을 벌이곤 하셨지요. 천장을 높이 한 것도 소리가 잘 울리도록 설계한 것이구요. 방문 틀까지도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그것 역시 판소리 공연을 위해 그렇게 설계하신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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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는 워낙 유명하게 잘 지어진 집인데다가 근동에 소문이 자자한 집이라 그런지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서 겪어야 했던 다양한 경험도 적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해방 직후엔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의 숙소로 쓰이기도 했구요. 한국전쟁 땐 공산당 도당위원장이 점거해 사용하기도 한 집이에요. 역사의 부침에 따라 영욕을 함께 한 집이지요."
대청마루와 안방을 보고 난 후 종부는 우리를 다락방으로 안내합니다. 밖에서 보이는 작은 다락창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커다란 규모의 다락방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곳엔 제사를 지낼 때 쓰이는 각종 제기와 조상 대대로 사용해 왔던 유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어느 해엔가 도둑을 맞았다가 다시 찾아왔다는 학인당의 옛 현판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요.
그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어느 하나 탐나지 않는 것이 없는 학인당의 이모저모를 보고나니 수수한 외모의 종부가 문득 부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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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집에 이 멋진 유품들에... 풍류면 풍류, 품위면 품위 다 갖추고 사시니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늘 행복하시죠?"
아줌마스런 우리들의 물음에 종부는 잠시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침에 눈뜨고 5분간은 정말 너무 행복해요. 그런데 나머지 23시간 55분은 정말 힘들답니다."
물어 본 우리 역시 그녀의 속내를 너무나 잘 알기에 함께 웃었습니다. 지문 하나 없이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창, 반질반질하게 길이 난 마루, 먼지 하나 얼룩 하나 없는 집안 구석구석에 희고 고운 이부자리까지... 안주인의 손길이 아니라면 저처럼 곱게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학인당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종부가 대문 앞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합니다. 그녀의 머리 뒤 높이 걸린 "효자 백낙중" 현액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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