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진/사진으로본 풍경

[사진]첨찰산 - 전남 진도군 진도읍, 고군면

박상규 2009. 10. 9. 19:05
첨찰산 485m
전남 진도군 진도읍·고군면 
2002.03.28


 약 한시간 정도 천천히 올랐는데 정상이다.



 정상의 돌단 모습, 바람이 거세어 서 있기가 힘들고..



 남녘의 봄은 무르 익는데 멀리 산,섬들이 아름답고



 



 



 천연기념물 107호 상록수림 터널을 간다.



 



 



 



 산자고



 양지꽃



 솜털양지꽃?



 현호색



 개별꽃



 

 

 

보리밥나무 - 9,10월에 꽃이 피고 다음해 4,5월에 열매가 익는다... 참고:~ 보리수나무는 봄에 꽃이 핀다
보리수나무는 아직 꽃도 피지 않았다.
어느분 말씀... 지난해 봄에 찍어 놨다가 "사기친다"라는 말을 했다.



 쌍계사



 



 개념도: 운림산방~아리랑시비~정상~넓적바위~약수터~쌍계사~주차장 2시간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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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http://www.chosun.ac.kr/~gsjang/에 있는 글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2000년 3월 11일의 글입니다.


묵향과 노랫가락이 산자락을 감싸고

봄은 남녘에서 시작된다. 내륙에서는 아직 겨울의 티를 완전히 벗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진도나 완도, 남해와 거제도 같은 섬에는 이미 봄소식이 전해진다. 그리고 봄의 따스한 기운이 여인들의 치맛자락을 파고들 즈음이면 동백이나 산수유,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린다.

뭍 여인의 마음을 설레게 할 봄바람이 남녘의 섬 진도에 불고 있다. 물론 훈풍에 자리를 내주기 싫은 차가운 바람이 가끔 투정을 부리기도 하지만 대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진도를 찾는 여정은 두 갈래다. 광주-목포간 도로를 달리다 목포시내로 접어들지 않고 영산강 하구언을 건너 화원반도를 거쳐가는 길과 영암·해남을 통하여 가는 길이 그것이다.

우리는 목포방향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다. 영산강 하구언을 지나고 대불공단을 지나자 화원반도다. 화원반도는 해남에서 서쪽으로 혀를 날름 내놓은 것처럼 목포 앞 바다까지 뻗어있다. 겨울에도 날씨가 그리 춥지 않은 이곳에는 지난 가을에 자란 폭 배추가 지금까지 밭에 서 있다. 겨울을 꿋꿋하게 넘긴 이곳 월동 배추에는 남녘의 따스함이 스며있다.

구불구불한 화원반도에서 바다 냄새와 흙 냄새가 풍겨온다. 따스한 갯바람을 쐰 황토 흙이 배추를 월동하게 만들고 마늘이나 양파 같은 채소류도 활개치며 살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

우리는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해협, 울돌목을 건넌다. 1984년에 세워진 연륙교인 진도대교 아래로 폭우가 쏟아진 뒤 큰물이 거세게 흘러가듯 세찬 물줄기가 휘돌고 있다. 이곳 울돌목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러한 조수의 흐름을 이용하여 왜군을 물리친 명랑해전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진도대교을 건너 진도 땅에 들어서자 지금 우리가 섬을 달리고 있는지, 육지를 달리고 있는지 착각이 일어난다. 그도 그럴 것이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도읍을 지나 운림산방으로 향한다. 어느덧 운림산방 앞 주차장에 도착한다. 운림산방과 쌍계사는 일단 하산하면서 들르기로 하고 곧바로 도로를 타고 사천저수지 위로 올라선다.

저수지 위로 올라서니 진도아리랑비가 서 있다. 진도아리랑은 때로는 처연하고 유장하게, 때로는 능청능청 휘감기거나 신나게 불려진다. 부르는 사람에 따라 즐거움과 애달픔, 익살과 한탄의 감정을 실어다 준다.


노다 가세 노다가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 가세
문경 새재는 왠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십오야 밝은 달은 내 사랑 같고 그믐의 어둔 밤은 내 간장 녹이네
다려가오 날 다려가오 우리 임 따라 나는 가네

이처럼 진도아리랑은 노랫말이 다양하고 부르는 사람마다 자기 정서에 맞게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한다. 각 구절 뒤에는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하는 후렴을 넣어 곡을 더욱 신명나게 만든다.

진도에는 아리랑뿐만 아니라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씻김굿, 다시래기 등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진도 만가와 북놀이 등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가 있다. 여기에는 노래를 좋아하고 풍요를 즐기는 진도 사람들의 넉넉함과 죽은 자에게까지도 생전의 소망이나 원한을 풀어주는 여유가 배어 있다. 그리고, 개인적인 소망을 넘어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나라를 지켜온 의로운 정신이 녹아 있다.

진도아리랑비 옆 계곡을 따라 첨찰산의 봄을 만나러 간다. 계곡은 원래 크지 않은 데다가 봄 가뭄까지 심하여 수량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서천암계곡으로 불리는 이 계곡 옆으로 난 길은 휘파람을 불며 갈 수 있을 정도로 완만한 오솔길이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하늘을 뒤덮고 있다. 워낙 짙은 숲을 이루고 있는데다가 올해는 봄이 오는 속도가 느려 동백꽃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간간이 보이는 강렬하면서도 처연한 모습으로 핀 동백꽃이 진도의 봄을 알려준다.

고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수종은 서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박달나무 등 낙엽활엽수지대로 바뀐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봄을 열심히 나르고 있다. 계곡 못지 않게 봄을 맞은 나무들도 분주하다.

나무는 땅 속의 수분을 열심히 나르면서 고요한 가운데 새 생명을 싹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첨찰산의 봄은 얼굴의 주름살을 펴주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등을 따뜻하게 파고드는 햇살로, 땅 속의 수분을 열심히 나르는 나무들의 분주함으로 와 있다.

20m에 이르는 와폭도 여름철 같았으면 하얀 구슬을 쏟아 부을텐데, 오늘은 폭포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어색할 정도의 수량이다. 숯을 굽던 가마터도 종종 눈에 띈다. 갑자기 하늘이 트이면서 시누대와 억새밭이 나타난다.

왼쪽에는 첨살산 정상이, 오른쪽에는 477봉이 서 있다. 초원지대를 조금 올라가자 샘터가 보인다. 서천암터다. 극심한 봄 가뭄에도 불구하고 물은 마르지 않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먹기에는 꺼림칙하다.

이곳에는 서천암이라고 하는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남쪽으로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이 터에는 억새만이 외롭게 나부끼고 있지만 깨달음을 얻으려는 많은 스님들의 넋이 배어있다. 능선 건너편의 동천암터에도 역시 샘터만이 암자 터를 지키고 있다.

정상과 477봉 사이 안부에 올라서자 널따란 헬기장이 있다. 정상의 봉수대가 도깨비 뿔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다. 양쪽으로 시야가 트이기는 한데 희뿌연 날씨로 시원스러운 바다를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먼저 올라간 일행들의 야호 소리가 메아리친다. 헬기장에서 정상은 지척. 단숨에 정상 봉수대에 도착한다.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그 사이에 바다라도 볼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맑아지기를 바랐건만 허사다.

첨찰산이 주는 멋의 1/3은 잃어버린 듯하다. 북쪽으로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골산(193m), 진도대교, 우수영 앞 바다가 시야에 들어와야 하건만 오리무중이다. 동쪽으로 수반에 떠 있는 수석 같은 삼마도와 바다 너머로 해남 두륜산이 가물거리지 않는다. 남쪽의 여귀산(457m) 너머로 출렁거리는 푸른 바다 물결을 볼 수가 없다.

결국 봉수대에 서서 이러한 전망을 상상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돌로 쌓은 원형 기단에 원추형 뾰족한 돌탑을 세워놓은 봉수대가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을 지키고 있다.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 서쪽 능선으로 내려서는데 경사가 급하다. 급경사는 활엽수 숲이 끝나면서 다시 완만해 진다. 그리고 쌍계사계곡을 만난다. 완만한 길을 따라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울창한 동백숲이 이어진다.

여수 오동도처럼 조그마한 섬 대부분이 동백나무로 이루어진 곳은 있지만, 산자락에 이렇게 넓고 울창한 동백 숲을 이룬 산은 첨찰산 뿐이다. 동백, 후박나무 등 상록활엽수가 태고적 자연미를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이곳 숲은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백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은 동백터널이다. 아직 완전히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하여 동백꽃 터널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아름드리 후박나무에서도 싱싱함이 전해져 온다. 계곡가에 있는 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신다.

동백나무 가지에 끈을 달아 길게 매달아놓은 표주박이 정성스럽다. 정성스럽게 매달아놓은 표주박에 떠서 먹는 물맛은 기분까지 상쾌하게 한다. 맛좋은 물을 마시고 완만한 길을 내려가는 발걸음에 여유가 생긴다. 가끔 만나는 먼저 핀 동백꽃이 나의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동백꽃을 바라본다. 동백꽃은 화려하면서도 그 속에는 슬픈 사연이 스며있는 듯하고, 강렬하면서도 청순한 이미지를 띠고 있다. 너무 붉어 유치할 것 같은데, 오히려 짙은 붉은 색이 지순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꽃이다. 빨강색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미를 동백꽃은 보여준다.

계곡과 동백이 어울린 고즈넉한 길은 쌍계사로 이어진다. 두 물줄기가 만난다고 하여 쌍계사라 불렀다. 대웅전, 십왕전,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쌍계사는 100년쯤 된 향나무를 비롯하여 벚나무, 느티나무 등에 푹 싸여 있어 깊은 산사 같은 느낌이 든다. 대웅전 뒤의 동백나무에서는 진한 동백꽃이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우뚝 솟은 첨찰산이 쌍계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편안하다.

쌍계사의 이웃에 있는 운림산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역시 동백꽃길을 따라 운림산방에 들어서자 네모난 연못 뒤로 ?자형 기와집과 초가, 그리고 새로 지어진 기념관이 있다. 몇 년 전 여름에 왔을 때는 배롱나무가 예쁜 꽃을 피워 운림산방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냥 포근한 느낌만 든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만년에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와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이름이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던 소치는 28세 때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 기거하던 초의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30대 초반에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의 추사 김정희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화수업을 받았고, 그 결과로 소치는 남화의 대가로 성장하였다.

운림산방은 소치뿐만 아니라 그의 셋째 아들 미산 허형, 손자인 남농 허건이 태어나 그림공부를 하던 곳이기도 하다. 소치의 직계는 아니지만 일가간인 의재 허백련도 이곳에서 그림을 익혔다.

그러니까 운림산방은 한국 남화의 탯자리인 셈이다. 그림공부를 했던 ?자형 운림산방과 살림채였던 초가를 둘러보며 묵향을 맛본다. 기념관에 전시된 작품들이 허씨 일가가 이룬 한국 남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운림산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진도는 그림의 고장이다. 진도 출신인 허씨 일가가 이룬 족적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집에 한국화 한 점 안 걸린 집이 없을 정도로 진도 사람들에게 그림은 친근한 존재다.

또한 진도는 아리랑을 비롯하여 판소리 등 우리의 노래가 생활화된 고장이기도 하다. 나는 몇 년 전 토요일 이곳 진도에 왔다가 진도문화예술회관에서 씻김굿, 다시래기, 판소리, 진도아리랑 등을 관람한 적이 있다. 진도에 와서 운림산방이나 남도석성 같은 곳을 둘러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도의 얼을 지키고 있는 노래나 굿을 구경하는 맛은 진도여행의 백미에 속한다.

운림산방을 나온 일행은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고군면 회동리를 찾는다. 회동리에서 본 바다가 시원하다. 바다 건너편으로 모도라 불리는 조그마한 섬이 보이는데, 음력 2월 그믐에서 3월 보름 사이에 2.8km에 이르는 모도까지 30∼40m 넓이로 바닷길이 열린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는 셈이다.

이런 곳에 재미있는 전설이 없을 수 없다. 옛날 진도에는 호랑이가 많아 회동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곤 했다. 호랑이 등쌀에 견디기가 힘든 마을 사람들은 어느 날 바다 건너 모도로 도망을 갔는데 급하게 가는 바람에 그만 '뽕할머니'를 빼놓고 가버렸다.

혼자 남은 뽕할머니가 몇날 며칠 바다로 나가 다시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용왕에게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자 바다에 무지개처럼 휘어진 길이 생겼다. 갈라진 바다를 건너간 뽕할머니는 가족을 만나자마자 기운이 다 빠져 죽고 말았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뽕할머니가 빌었던 바위에 제단을 차리고 할머니의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해마다 바다가 갈라지는 날을 뽕할머니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 날이라고 하여 영등(靈登)살이라고 불렀다.

뽕할머니가 지성으로 빌었던 그 자리에 뽕할머니상이 세워져 있다. 모도를 쳐다보고 앉아 있는 뽕할머니상 바로 밑에서는 음식을 장만해 놓고 가족의 안녕을 비는 굿이 한창이다. 굿이 끝나면 음식을 먹고 가라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용장산성으로 향한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대몽항쟁 근거지였던 용장산성은 성의 둘레가 13km에 이르는 거대한 산성이었다는데, 현재는 남북 9단과 동서 3단의 석축과 건물터, 우물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한 삼별초는 고려가 몽고에 항복하자 왕족인 온(溫)을 새 왕으로 받들고 고려 조정에 대립하는 정권을 세웠다.

고려군과 몽고군에 쫓긴 삼별초가 1천여 척의 배에 재물과 사람을 싣고 남쪽으로의 긴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이 진도 벽파진이다. 삼별초는 이곳 용장성에 터를 잡은 후 기존에 있던 산성을 개축하고, 궁궐을 지어 권토중래를 꿈꾸었다.

삼별초는 결국 9개월만에 지도자 배중손과 왕으로 옹립한 온이 죽고, 일부가 제주도로 옮겨 2년 동안 격렬한 항쟁을 하다가 진압되기에 이른다. 궁궐이 있었던 자리에 서서 지금으로부터 730년 전의 삼별초를 생각한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삼별초의 깨어진 꿈을 전해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