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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부끄럼을 탔다. 몹시 비가 내렸고 여자는 구름 속에 숨었다. 산꾼에게 비가 온다는 건 방전된 자동차처럼 모든 게 멈추는 것. 멍하니 창밖의 빗소리에 시선을 두고 어느 산쟁이의 엉뚱한 얘기를 되새겼다.
“문경에 기막힌 여자가 있어. 몸매가 끝내 주는데 그 여자는 산꾼들하고만 살을 섞는대. 궁금하지 않나? 들어 봐. 옛날 문경 땅에 멋진 산이 솟았어. 자기가 난 땅이 한양이 될 줄 알았는데 더 예쁜 북한산이 한양을 차지한 거야. 그래서 문경 미녀는 토라져서 한양을 등진 채 돌아앉았다는 얘기야. 어때 산꾼이라면 타 봐야 되지 않겠어?”
코웃음으로 넘길 법한 얘기를 따라 문경까지 온 건 마성에서 본 산세 때문이었다. 하늘의 성채처럼 화려하게 솟구친 산마루는 눈을 떼기 힘들었다. 첫인상은 뭐랄까. 여느 육산들은 아주 우습게 보는 도도한 바위산 같았다. 마성에서 본 산세는 아름다운 여인이 머리를 풀고 다리를 길게 뻗어 누워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내의 노골적인 의중을 읽었는지 문경 미녀는 빗속에 몸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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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산행 기점인 1관문 주흘관. 문경새재도립공원에는 박물관과 드라마세트장 등 볼거리가 많다. 2. 대궐터 약수. 사계절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3. 곡충골의 시원한 계류. 작은 계곡이지만 더위를 식히기에 모자람이 없다.
토라져서 남쪽으로 돌아앉은 산
미안하지만 비 맞는 산을 창 밖에 세워두었다. 쉴 새 없이 비는 곤두박질쳤다. 콘크리트 바닥은 비를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산은 달라 묵묵히 서서 흠뻑 받아들였다. ‘하늘에서 쫓겨난 것들, 또 어디서 받아주겠느냐’며 제 몸을 다 내어주고 있었다. 어느 순간 산의 결에서 황홀한 구름이 피어올랐다. 괴로움을 안으로 오래도록 삼키면 이르는 경지인 것을. 스스로 피어난 산이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흘러간 산이 되돌아온 건 폭우가 그친 아침이었다. 쨍 하진 않지만 여린 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췄다. 한 무리의 등산인과 함께 갔다. 방배 우정산악회 최진무(70) 회장과 김기영(60) 산행대장, 정재순(57) 회원, 문경 산들모임 이상만(52) 회장이다. 최 회장이 만들어 11년째 운영하고 있는 서울 방배 우정산악회는 안내산악회다. 안내산악회라 하면 색안경을 쓰고 보는 이도 있지만 우정산악회는 나름 고집스런 산악회로 400회가 넘는 정기산행 동안 같은 산을 간 적이 한 번도 없는 개척산악회다.
반듯하게 정리된 1관문 잔디밭을 버리고 조금 어둑한 기운이 감도는 곡충골로 들었다. 어제 내린 비로 물살이 싱싱하다. 산을 박차고 흐르는 힘찬 소리와 투명한 물보라가 골을 가득 메워 깊숙이 들수록 더위가 멀어졌다. 오를수록 물소리는 커졌다. 오르막에 올라서니 작은 소가 있고 바위 협곡에서 하얀 비룡이 거칠게 꿈틀거린다. 바위틈을 타고 물줄기가 콸콸 쏟아진다. 그 울림이 골을 다 채우고 미세한 물보라들이 파도를 일으키며 얼굴에 와 닿는다. 옛날 7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진부한 전설이 있는 여궁(女宮)폭포다. 이름의 유래는……. 직접 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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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주봉에서 영봉으로 이어진 능선길. 육산의 부드러운 흙길이라 걸음이 편하다. (아래) 주봉에서 본 문경 시가지. 주흘산은 너른 품과 위용을 갖춘 문경의 진산이다.
계곡에서 멀어지자 밀린 숙제처럼 가파른 길이 쌓여 있다. 지난 비로 진흙탕이라 디딤이 조심스럽지만 걸음걸음이 쌓여 1,000m가 넘는 산도 금방 오를 수 있음을 안다.
숨이 넘어갈 듯 차오르는 과정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산 밖에서도 이 헐떡이는 숨결이, 헐떡이게 만드는 깔딱고개가 한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심장이 펄떡거리고 다리는 무거워지고 몸은 자꾸 ‘멈추자, 여기 서자’고 하는데 마음이 허락하지 않을 때, 마음이 몸을 이끌어 비탈을 확 쳐 오를 때의 고통스런 감각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온 힘을 쥐어짜는 그 순간의 고통스러운 짜릿함이 좋다면, 도시스러운 것들에 환멸이 났거나 산에 중독되었거나를 의심해 봐야 한다.
등산로에 물이 계속 흘러내린다 했더니, 대궐터 약수가 철철 넘친다. 대궐터는 이름이 무색하게 좁으나 고려 공민왕이 난을 피해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사찰 이름도 혜국사(惠國寺)다. 약수터에는 ‘주흘산 100번 오르니 이 아니 즐거우랴’라는 글귀가 돌에 새겨져 있는데 문경의 초등학교 교장인 서종섭씨가 10년 전에 세운 것이라 한다.
주봉 꼭대기는 나무가 많지만 남쪽으로 뚫려 있어 문경시내가 훤하다. 시내가 산의 품에 안긴 게 한눈에 드는 전형적인 지역의 진산이다. 산세 또한 시내가 있는 남쪽으로는 경사가 순하지만 북쪽으로는 무척 가팔라 ‘토라져서 남쪽으로 돌아앉은 산’이란 얘기가 맞아떨어진다. 오후로 접어들수록 구름이 짙어졌다. 걸음을 서둘러 북으로 향했다. 주봉과 영봉을 잇는 능선은 오르내림이 적은 흙길에 조망도 없어 자연스레 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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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충골 오름길의 다리. 곡충골은 작지만 등산로가 계곡 바로 곁으로 나 있어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 영봉 꼭대기는 나무가 빽빽하고 좁아 터져 생판 모르는 사람도 몇 명만 모이면 서로 대화를 나누게 하는 친화력이 있다. 영봉은 주흘산의 최고봉이며 신령 영(靈)자를 쓰는 범상찮은 봉우리다. 최고봉다운 조망은 없고 표지석이 전부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는 설이 있다.
주흘산은 이름이 예쁘고 특이하다. ‘산 우뚝 솟을 흘(屹)’자와 주인 주(主)자를 곁들여 우뚝 솟은 주인이란 뜻이지만 주변을 보면 월악산·조령산·대미산·황장산 등 1,000m가 넘는 큰 산들이 줄을 섰다. 그럼에도 ‘주흘’이라 이름을 붙인 것은 문경의 진산이며 멀리서 본 산의 자태가 워낙 빼어났기 때문이다.
주흘산은 주봉(主峰)과 영봉(靈峰·1,106m), 부봉(釜峰·921m)으로 이뤄져 있는데 동행한 이상만 회장의 문경산들모임산악회에서 모두 표지석을 세웠다. 문경산들모임은 1995년부터 회원들의 회비를 털어 매년 문경의 산에 표지석을 세웠다. 이곳 영봉은 누군가 고의로 표지석을 뽑아 버리는 바람에 2003년 이틀에 걸쳐 회원들의 땀으로 다시 올렸다고 한다.
‘부봉 1.3km’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부터 대간 길이다. 대간이라 해서 특별히 더 웅장한 풍경 같은 것은 없고 더 가파른 오름이라 힘들다. 부봉으로 향하는 길, 암릉이 잦다. 줄지어 기다리는 암봉을 맞기 위해 스틱을 접어 배낭에 꽂았다. 손발로 바위와 흙의 틈을 야금야금 뜯어가며 올랐다. 야윈 무덤과 표지석이 있는 부봉 정상에 서자 비가 온다. 마침 무더웠는데 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