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정보

운해의 절경 속 신선을 찾아서_남해 보리암

박상규 2009. 11. 6. 21:56
 
 
 
 
 




남해도 보물섬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660m의 주황빛 남해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육지의 끝을 알리는 다리다. 다리 위의 왕복 2차선 도로와 인도
덕분에 남해도의 땅을 밟고 있어도 이곳이 섬이라는 느낌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라고 했던가. 섬의 크기로 보아 해안도로를
달리며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나서야 남해도에 들어섰다는 기분을 줄 것 같다.

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로 남해에서 10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던 자암 김구는 ‘화전별곡’에서 남해의 풍경을 보고 ‘신선의 섬’이라 표현했다.
평온한 한려해상의 물결 없는 잔잔함과 운무로 흐트러진 수평선 끝자락에서 신선이라도 나올 듯 보인다. 이리도 평온한 바다가 있을까.
짭짤하고 비린 맛도 없는 담백함이 마치 깊은 산속 담수만을 모아 놓은 듯하다. 주황빛 교각 위에 떨어진 붉은 해를 등지고 섬 깊숙이 들어간다.
한려해상의 수려한 경관을 코앞에 두고 있는 황토 집에 숙소를 잡고 내일의 일출을 위해 이른 잠자리에 들었다.

아직 해뜨기 전이다. 어스름한 하늘빛이 일출을 위해 늦지 않은 시각임을 알려준다. 주차장 한곳에 차를 세워 두고 보리암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해남의 땅끝 마을 그리고 여수의 향일암과 더불어 남해 3대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니 놓치고 싶지 않다. 기도의 효험이 좋다는 명산의 정상을 위해 걷는 길. 그 산길을 지나면서 이미 속세의 너저분한 먼지들을 털고 가는 기분이다. 오르막길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부지런한 산새들의 지저귐이 발길을 가볍게 만든다. 시멘트 포장이 된 오르막길을 걷다가 보리암으로 올라가는 셔틀버스를 얻어 탔다. 버스 안에서 새벽의 어둠을 꿰뚫듯 낭랑하게 불가가 울려 퍼진다. 불가를 들으며 서서히 밝아 오는 빛을 향해 경사진 도로를 올라가니 극락정토를 위한 여정인 듯 착각이 든다.



 
애초에 금산은 금산이 아니었다. 보광산이라 불렸던 금산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 금산으로 바뀌어 이름에 비단을 두르게 된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을 앞두고 백일기도를 허락했던 보광산 전체에 비단을 둘러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건국 후 지혜로운 충신의 조언으로 이름에 비단 금(錦)을 넣어 주며 그 약속을 지켰다 한다.

681m 작은 산에 금산 38경이라는 승경지가 모두 들어서 있으니 비단 금의 금(錦)자가 아깝지 않은 산이다. 보리암에서 산 정상까지 10여 분 거리니 보리암 암자자리가 거의 금산 정상부다. 고도가 올라가서일까, 성산으로의 접근을 쉽게 허락해 주지 않기 위함일까, 새벽 찬바람의 기세가 거세다. 기암괴석들 사이에서 여명을 바라보는 인자한 표정의 해수관음보살이 보인다.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 하니 합장하고 소원을 빌어본다.

관음보살 옆의 3층 탑 위에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켜야 할 것이 제 방향을 잃고 동서남북 흔들거린다. 풍수지리학자는 이곳에 우주의 기운이 들어 있어서 그렇다 하고 혹자는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서 그런다 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기암괴석의 이런 산세와 망망대해를 조망하는 이곳에서는 그 어떤 기도도 하늘에 전해질 것 같다.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던데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인적이 없다. 여명을 기다리며 해수관음보살 앞에서 기도드리는 한두 사람이 보일 뿐이다.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과 서해의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3대 관음성지로 유명한 보리암은 기대만큼 규모가 큰 암자는 아니다. 하지만 금산 정상부에 밀집된 기암봉들과 한려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월한 조망이 이미 이 작은 암자를 성지로 만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태후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서 어려움에 처했는데 허태후가 파사석을 싣고 오자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한다. 그 후 원효 대사가 이 돌을 깎아 보리암을 세웠다 한다.

곱디고운 구름 비단을 고이 접어 펼쳐 놓았는가. 자욱한 운무에 망망대해 수평선의 경계는 사라지고 그 아리따운 자연의 자태에 마음의 경계 또한 스르르 무너져 버린다. 눈을 통해 들어온 풍경에 나는 지상의 내가 아니다. 이미 신선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듯하다. 아아. 이래서 이곳을 불심 깊은 불자들이 모여드는 3대 기도처라고 하는구나. 마치 조각을 해놓은 듯 기괴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는 절벽과 영산의 정상 가까이 깊은 숲 안쪽에 자리 잡은 터만 봐도 끄덕여지는데 눈앞에 펼쳐진 장엄한 일출장관은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진다.
끝자락부터 서서히 밝아 오는 빛이 잿빛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수줍은 듯 고개 내민 아침 해는 절경의 절정을 표현한다. 3년 동안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 했나. 자연이라는 대가가 그려 놓은 한 폭의 수묵화에 넋이 나가 새벽녘 칼바람도 잊었다. 둥근 해가 산자락 높이까지 올라가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암자 안 훈훈한 인심의 보살님이 건네주신 따뜻한 녹차 한잔으로 꽁꽁 언 몸을 녹인다. 극락정토의 한 면을 보고 뜨거운 녹차로 몸을 푸니 이보다 좋은 것이 또 있을까. 한 줄기 뜨거운 태양을 삼키듯 몸을 덥혀주는 보살님의 녹차 한 잔에 신성의 기운을 받는다.


 


날 좋은 날 보리암에서 상주의 초승달 은모래 비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던데 그 보물 같은 해안을 보여 주기 싫었는지 운무로 가려져 궁금증만 더해 준다. 보리암의 일출을 본 뒤 여전히 설레고 있는 마음을 가다듬고 상주로 차를 돌렸다. 여름이었으면 북적였을 주차장도 비어 있고 가장자리의 학교도 정적뿐이다.
시원하게 뻗은 해안의 굴곡엔 사람의 흔적이 없다. 총총 걸음으로 밀가루 같은 고운 모래를 찍고 있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전부다. 천천히 조개로 수놓아진 길을 걷는다. 맑디맑은 물은 그 밑바닥까지 보여주다가 싣고 나간 고운 모래로 다시 뿌옇게 바래진다. 속삭이듯 조용히 밀려왔다 넓은 바다로 퍼져 나가는 파도가 모래뿐 아니라 마음의 짐도 퍼가 버리나. 부드러운 자궁 안 같은 굴곡의 비치를 걷고 있자니 세상의 근심이 녹아내린다. 금산 고지의 칼바람도 이른 아침 보리암을 향했던 피로감도 잊어버렸다. 어깨에 놓인 세상의 무거운 짐도 놓아 버렸다. 봄기운 가득한 은모래의 비치와 바다는 그렇게 낯선 여행자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한려해상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물미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한다. 독일 거주 교포들의 정착 생활지인 이국적인 독일 마을을 구경하고 창선교를 건넜다. 해안도로를 따라 움직이다가 다리로 이어지는 섬들을 보니 이제야 남해가 섬이었음을 확연히 느낀다.

남해 여행 기념으로 살아 있는 먹거리를 담아가기 위해 활기찬 삼천포 어시장에 왔다. 잠시 몽롱한 꿈을 꾼 듯 신선의 세계에서 머물다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분주히 먹잇감을 쫓아 하늘을 낮게 날고 있는 갈매기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커다란 날개를 펴고 날고 있는 녀석들을 본다. 지금까지 봐왔던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는 없다. 모든 것이 살아 있고 생생하며 경쟁적이고 생명의 활력이 넘쳐 난다.
줄줄이 엮여 정착해 있는 고깃배들은 언제든 미지의 바다를 향할 수 있게끔 준비가 되어 있다. 횟집을 찾고 있는 한 무리의 청년들을 잡으려는 상인들의 구수한 사투리가 들려온다. 살아 숨쉬는 싱싱한 문어와 털게들을 스티로폼 박스에 고이 모셔본다. 그 맛과 여운을 남겨줄 문어와 털게들로 신선의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Travel Information

■ 보리암 교통정보

남해고속도로 진교IC를 빠져 나온다. 1119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남해대교가 나온다. 대교를 건너 19번 국도를 타고 남해를 지나 상주 방면으로 간다. 신전삼거리에서 상주 방면으로 직진하다 첫 번째 교차로에서 금산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복곡 저수지 주차장이다. 교차로에서 직진해서 100m 정도 가면 상주면 금산매표소가 나온다.

■ 추천 식당
밍크회고래(http://minke.co.kr)
창선교의 원시 어업죽방령을 앞에 두고 있는 횟집이다. 수려한 경관도 경관이지만 무엇보다 앞바다에서 잡은 신선한 회와 넉넉한 인심에 정성 가득한 음식들이 남해 여행의 멋을 더해 준다.

남해별곡(www.nhbg.co.kr)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황토 통나무집으로 통유리 창을 통해 남해의 절경을 감상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에디터_임한나 사진_il 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