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의 본명은 윤식(允植). 1915년 결혼했으나 일찍 상처(喪妻)했다. 아내를 잃은 슬픔을 "쓸쓸한 뫼 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양금줄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쓸쓸한 뫼 앞에〉)라고 노래했다. 고향인 강진에서 만세운동을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일본 유학 때에는 무정부주의자 박열과 가깝게 지냈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1950년 9·28 수복 때 유탄에 맞아 애석하게도 운명했다.
영랑은 '내 마음'을 많이 노래했다. 초기 시에서는 '내 마음'을 빛나고 황홀한 자연에 빗대어, 주로 3, 4음보 4행시에 담아 은은하고 섬세하게 노래했다.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자연에 순결한 마음을 실어 노래했다. 이것은 불순하고 추악한 식민지 현실을 대립적으로 드러내려는 속내가 있었다.
이 시를 김영랑은 나이 서른 살을 갓 넘긴 무렵에 썼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나의 꿈과 그 시간의 보람, 모란이 지고 난 후의 설움과 불모성을 함께 노래했다. 이 시는 찬란한 광채의 '절정에 달한' 시간을 포착하듯 짧게 처리하면서 음울과 부재의 시간을 길고도 지속적으로 할애하는 데 시적 묘미가 있어 보인다. 시인은 낙화 후의 사건을 아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떨어져 누운 꽃잎'의 시듦뿐만 아니라, 시듦 이후의 건조와 아주 사라짐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이렇게 한 데에는 모란이 피는 희귀한 일의 극명(克明)한 황홀을 강조하기 위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는 감미로운 언어의 울림을 살려내는 난숙함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고,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둔 슬픔'을 특별하게 읽어낼 줄 알았던 영랑의 유다른 안목과 영리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시가 사람이라면 그이는 무엇을 간곡하게 바라며 뛰는 가슴인가. 많은 시들이 울분과 슬픔의 감정을 표표하게 표현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삶이 더 찬란한 쪽으로 몰아쳐 가기를 바라는 열망에 기초해 있다. 한편 한편의 시는 그런 마음의 예감과 기미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아무리 작은 것을 노래해도 이미 뜨겁고 거대하다.
애송시 100편의 연재를 오늘로써 마친다. 가쁘게 오면서 우리 시를 사랑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느꼈다. 열독에 감사드린다. 이제 당신의 마음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살아라. '허리통이 부드럽게' 드러난 보리의 오월을 보아라. 신록의 눈동자로 살아라. 당일(當日)에도 명일(明日)에도 우리네 마음은 '향 맑은 옥돌'이요, 은물결이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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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편집:오뚜기 김창룡.
▒☞[출처]조선일보(http://www.chosun.com) 2008.5.5 (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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