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俗離山·1058m)은 초·중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다녀온 곳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요즘이야 제주도나 심지어 해외로 가지만, 1970~1990대에는 수도권 학교의 수학여행 장소로 속리산이 널리 이용됐다. 그 뿐인가. 가을에는 버스를 대절해서 찾는 단풍관광 명소가 법주사를 중심으로 한 속리산 사내리 계곡이었다. 그런데 누구나 찾던 곳은 오히려 이름이 퇴색하기도 한다. 속리산도 산의 진면목에 비해 ‘싼 값’에 취급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는구나/ 산은 사람(俗)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옛 적에는 말 그대로 ‘속리’(俗離)가 여기였을 것이다.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 있는 속리산은 지금이야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접근이 수월하지만 옛 적에야 내륙중에 첩첩산중이었다. 위의 시(詩)는 신라말기 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시를 속리산 이름이 지어진 연원으로 보기도 한다. 속리산이 속한 보은군에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쯤 되는 ‘금(金)돼지’전설이 전해오는 것으로 미뤄 최치원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보다 100여년 앞선 유래도 있다. 신라의 승려로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율사가 구봉산(속리산의 그 전 이름)에 오르기 위해 보은에 다다랐을 때 들판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았으며 이를 본 농부들이 줄줄이 ‘속세를 떠나’(俗離) 출가해 여기서 ‘속리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속리산이라는 이름에는 옛 사람들 뿐 아니라 우리 현대 도시인들이 한번쯤은 꿈꾼, ‘툭’털고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담겨져 있다. 23일 속리산을 찾았을 때, 먼저 맞이하는 것은 법주사 입구를 막고 있는 사하촌의 요란한 대중음식점들이다. 어디는 안그런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서 산을 올랐지만, 산 꼭대기 능선까지 곳곳에 포진한 음식점을 만나면서는 다소 마음이 헛헛했다. 대개 명산들을 보면 산 속까지 파고들었던 대중음식점들은 거의 정비가 돼 있는데, 이 곳은 그렇지 않았다. 요즘 등산 마니아들은 ‘환경’에 관심이 많다. 이날 한 중년의 등산객도 음식점을 지나치면서 “이름이 속리지 속리가 아닐세”라고 한마디를 했다. 그런데 동행하던 등반객이 한마디를 더 한다. “이 사람아, 뭔 속리가 따로 있나?” ◆천황(天皇)과 천왕(天王) “속리산의 최고봉은 천황봉(天皇峯)이다”라고 대답하면 오답이다. ‘천왕봉(天王峰)’이 정답이다. 지난해 12월 중앙지명위원회가 천황봉을 천왕봉으로 바꾸는데 동의한데 이어 국토지리정보원이 지명변경을 고시했기 때문이다. 일제 때 붙여진 천황봉이란 이름이 일본 왕을 뜻하는 일제 잔재라는 게 개명 이유였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정확하게 ‘천왕봉’으로 기록돼 있다. 1911년 5월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만든 한국지형도에까지 천왕봉으로 적혀 있으나, 일본총독부에서 만든 1918년 지도부터 천황봉으로 표기돼 있다. 일제가 일왕의 의미인 ‘황(皇)으로 바꾼 게 명확해지는 증거다. 한반도에는 ‘천황’이란 이름을 가진 산(봉)이 계룡산 등 20개 가까이 있는데 대개 일제가 바꾼 것으로 의심 받고 있다. 어쨌든 그동안 녹색연합 등 시민단체와 개인들이 나서 개명운동을 펼친 결과로 지자체와 정부 관련기관이 뒤늦게나마 천왕봉의 이름을 바로잡은 것이다. 하지만 23일 법주사 방면으로 속리산을 오르면서 보니, 아직도 모든 표식이 그대로 ‘천황봉’으로 남아있었다. 들입목의 안내지도판부터 이정표, 정상의 표지석까지 바뀐 것을 보지 못했다. 보은군이 만들어 배포하는 속리산 지도는 지명변경 전에 인쇄된 것이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지명변경이 결정된 지 반년이 지났으나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무얼했는지 알 수 없다. 부탁하고 싶은 것은 이름표식을 바꾼다고 멀쩡한 안내판이나 이정표를 통째로 교체하는 일을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저 페인트 두어 통만 갖고 몇 분의 직원이 수고하면 될 것 같다. 정상 표지석은 바꿔야 겠지만. ◆문장대의 운해(雲海)…천왕봉의 고적(孤寂) 속리산 산행은 대개 법주사를 들머리로 한다. 그 너머 상주의 장암리에서 문장대로 치고 오르는 코스도 있지만 법주사를 거쳐 세심정에서 갈라지는 세 가닥 코스가 가장 선호된다. 이날 선택한 길은 세심정에서 가장 왼편 길로, 중사자암을 지나 냉천휴게소를 거쳐 문장대에 오른 뒤, 속리산의 백미인 문수봉-신선대-입석대-비로봉-천왕봉의 장대한 산줄기를 즐기고, 상환암 방향으로 세심정에 떨어지는, 넉넉히 7~8시간의 코스였다. 보통 문장대를 올라 그대로 내려오거나 중간에 신선대에서 떨어지는 등산객이 가장 많다. 속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이지만 그 보다 문장대(文藏臺·1054m)가 인기가 높다. 그래서 휴일에는 몹시 붐빈다. 그래서인지 천왕봉은 좀 외로워 보이기도 하는데, 비로봉 옆 석문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길의 무언가 고적한 맛은 문장대의 화려함보다 깊이가 있다. 문장대를 일명 운장대(雲藏臺)라고도 부르는데 이날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알았다. 문장대에서 장암리 방면으로 운해가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아마 지형적인 영향인 듯한데, 이 지역은 그 너머 법주사 사내리 방면에는 높은 구름이 몇 점 떠있는 날에도 운해가 형성되곤 한단다. 보통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찾아 운이 좋았을 때 만나는 운해를 문장대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문장대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정상 능선길은 한마디로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명품’이다. 신선대와 입석대 등 기기묘묘하면서도 엄청나게 큰 바위 사이를 걷는 맛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여유롭게 2시간 정도 걸리는 정상능선은 굴곡도 그다지 심하지 않은 편이어서 사색을 하며 걷기에 좋다. 여름에는 아주 맑은 날이 아니면 운무가 짙어 암봉을 감상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한 폭의 동양화같은 풍광을 연출하기도 한다. 문장대 이후 식수원이 없으니 문장대 정상 휴게소에서 꼭 물을 챙겨야 한다. <등산코스> ▲문장대코스=법주사-세심정-문장대-법주사(4시간30분) ▲신선대코스=법주사-세심정-문장대-신선대-경업대-금강굴-법주사(5시간) ▲천왕봉코스=법주사-세심정-천황봉-법주사(6시간) ▲종주코스=법주사-세심정-문장대-천왕봉-세심정-법주사(8시간) <교통> ▲승용차=서울(경부 또는 중부고속도로)→청원 JC→속리산 IC→속리산 ▲대중교통=남부터미널→속리산행버스(3시간30분 소요) 하루 3회(첫차 13:10, 막차 19:05, 요금 일반:1만3500원) 동서울터미널→속리산행버스(3시간30분소요) 하루 12회(첫차 7:30, 막차 18:30, 요금:일반 1만4000원) 글·사진 = 엄주엽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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