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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은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흐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 하나를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히듯 들리며 공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잡히듯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 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은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가산 이효석님의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한국적 서정이 넘치는 이 작품은 우리 문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문학성을 갖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봉평을 찾는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문학적인 가치를 찾아 그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이곳을 찾는 것일까. 아니면 작품 속의 한 장면인 메밀꽃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일까.
한겨울의 봉평에 메밀꽃이 있을 턱이 없건만 그래도 봉평은 메밀꽃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다. 꽁꽁 얼어붙은 논밭을 둘러보는 눈길은 주책없이 메밀밭을 상상하지만 그게 어디 어림이나 있는 일인가. 지난 1월 19일 오후에 찾은 봉평은 영하의 추운 날씨에 얕게 깔린 잔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사실 그 시절 메밀밭이야 어디 봉평뿐이겠는가. 이 나라 어디를 가도 흔한 것이 메밀밭이었다. 기름진 논밭에서는 다른 작물을 재배하고 비탈 밭 박토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 메밀이어서 메밀을 많이 재배하였다. 아직 연한 잎일 때는 된장 풀어 나물로 무쳐 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고, 메밀묵이야 더 말할 나위 없는 우리들의 전통식품이 아니던가.
그래서 어디에서나 흔하게 재배되었던 것이 메밀인데 유독 봉평의 메밀이 유명한 것은 바로 가산 이효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 때문이다. 그 유명세 때문에 초가을 메밀꽃이 필 무렵이면 봉평을 찾는 관광객들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다른 지방에서 연고권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지방자치 시대에 걸맞게 거리는 어디를 가도 '메밀꽃 필 무렵' 일색으로 이곳이 봉평이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허생원이 조선달, 동이와 함께 나귀를 타고 걷던 길은 어디쯤일까. 저 산비탈 길 어디쯤을 걸으며 달밤 흐드러진 메밀꽃에 매료되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펴보아도 벌써 한 달째 계속된 추위로 얼어붙은 산야는 메밀꽃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산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 도로 옆에는 멋있고 거대한 얼음동산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보기 좋게 얼어붙도록 누군가가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도 초가지붕 처마 밑으로 뻗어 내린 고드름은,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렸지만 옛날 이맘 때 쯤의 그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을 따먹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였다. 얼지 않은 작은 연못에는 잉어가 헤엄을 치고, 연못 뒤로 쭉쭉 뻗어 올라간 얼음 기둥이 마치 성처럼 웅장한 모습이다. 지나가던 젊은 커플들과 어린아이를 동반한 사람들은 얼음동산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계속되는 추위도 아랑곳없이 봉평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을 얼음동산이 붙잡고 지키고 있는 것이다.
가산의 생가는 제법 근사한 기와집이었다. 그 시절 요만한 집에 살았다면 잘사는 집이었으리라.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짧은 기간이나마 총독부 경무국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던가. 그의 길지 않은 생애(1907-1942)에 옥의 티처럼 흠집을 남긴 그의 경력이 문학작품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의 행적을 시대적 상처로 치부해야 할까, 한 개인의 인격적인 관점에서 평가해야 할까. 한 천재작가의 생가를 돌아보며 착잡한 아쉬움에 마음이 무겁다.
집 안에는 옛날에 쓰던 농기구인 쟁기와 탈곡기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옆집은 찻집이었다. 찻집 이름은 역시 '메밀꽃 필 무렵'. 처마 밑 한 쪽에 탑처럼 층층이 쌓여 있는 폐 가마솥이 이채롭다. 입구에는 씨앗용 옥수수가 매달려 있고 안에는 여기저기 다녀간 사람들의 명함이 흡사 '나 여기 다녀갔어요' 하듯 진열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이 메밀 차 한 잔으로 추위를 털어버리고 돌아서 나오는데 사람들을 가득 실은 관광버스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메밀꽃이 피려면 아직은 멀었건만 봉평을 찾는 사람들은 효석을 찾아오는 걸까, 메밀꽃의 그리움을 찾아오는 걸까. 마침 차창 밖으로 바라본 창백한 겨울 하늘에 흰 구름 한 무더기가 해를 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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