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가 없는 도보여행 또는 산, 들과 바람 따라 떠나는 사색여행.’ 백과사전은 ‘트레킹(Trecking)’의 뜻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람 따라 가는 사색여행’이란 사전의 뜻과 딱 맞는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 바로 울진의 왕피천입니다.
이 땅에서 마지막 남은 오지의 물길이라는 왕피천을 따라가는 트레킹 코스는 바람소리와 물소리, 새소리 외에 다른 어떤 소리도 없는 길입니다.
자동차의 경적이나 그 어떤 기계음의 방해도 없이 잘박잘박 제 발자국 소리만 데리고 적막강산 계곡의 물길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왕피천(王避川)이란 이름은 삼국시대 이전 삼척과 울진지역을 지배하던 실직국의 왕이었던 안일왕이 강릉일대에 근거지를 둔 부족국가 예에 쫓겨 피란을 왔다는 왕피리(王避里) 마을에서 딴 것이라지요. 왕피천은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금장산에서 발원해 울진군 서면 왕피리를 거쳐 매화천과 불영계곡의 하류인 광천과 합쳐진 뒤 동해로 흘러듭니다. 험준하게 솟은 산과 절벽을 휘감아 흘러내리는 물길의 길이만 67.8㎞. 길이만으로 따지자면 남한의 강 중에서 8번째로 긴 물줄기인 셈입니다.
높은 산과 까마득한 직벽으로 가로막힌 왕피천은 예나 지금이나 접근이 어려운 곳입니다. 협곡을 굽이치는 절경을 갖고 있음에도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때묻지 않은 비경을 간직한 것도 이 때문이지요. 경관뿐만 아닙니다. 물길을 따라 연어와 은어, 황어가 집단으로 회귀하고, 물길을 끼고 있는 깊은 산중에는 산양과 수달이 서식하는 생태의 낙원이기도 합니다.
왕피천이 흘러가는 최고의 명소는 왕피리 속사마을부터 구산리 굴구지 마을까지 이어지는 5㎞의 구간. 이 길은 물길을 따라 두 발로 걷지 않으면 아예 접근할 수 없는 곳입니다.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하는 왕피천의 거울처럼 맑은 물을 바라보며 바위를 딛고, 자갈밭을 걷고, 발목을, 무릎을, 허벅지를 적시면서 물길을 건너는 계곡 트레킹은 번잡한 마음을 말끔히 씻어내립니다. 장딴지며 허벅지에 닿아 미끄러지는 물살의 느낌이 참으로 부드러웠습니다.
굴구지 마을을 출발해서 3.5㎞쯤 물길을 따라 올랐다가 ‘왕피천 최고의 비경’이라는 용소 앞에서 감탄만 쏟아놓고는 발길을 되돌렸습니다. 물의 수심이 키를 넘는다는 용소를 혼자서는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탓입니다. 절벽의 로프를 잡고 어찌어찌 버텨보다 돌아서면서 아쉬운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애초에 트레킹이란 것이 ‘목적지가 없는 도보여행’이라니, 중간쯤에 돌아서 내려온들 어떻겠습니까. 용소까지 오가는 왕복 2시간30분은 그것만으로도 족히 황홀한 것이었지요.
울진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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