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산(億山 944m)은 영남알프스의 유명세에 가려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지역 사람들에게 은밀하게 사랑을 받아온 산이 있다. 수려한 경관과 깊고 유현한 계곡을 갖추고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은 이 억산(944m)은 경상도를 남과 북으로 가르는 운문산-가지산 능선의 서쪽 연장선 상에 자리하고 있다. 억산을 오르는 길은 석골사쪽의 계곡이 완만해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정상부의 바위를 올려다보는 경관이 뛰어난 대비사쪽 계곡도 또다른 산행의 재미를 준다. 이 계곡은 대비사를 품고 있으면서 그 이름을 석골사쪽 계곡에 양보해 버렸다.
대비사쪽은 가파른 계곡. 산행 초입에는 신라의 천년고찰 대비사를 만나게 된다. 맞배지붕을 한 대웅전(보물 제834호)은 단청을 덧칠하지 않아 오히려 고풍스러움에 정갈함을 더한다. 산행은 불경소리가 낭낭하게 퍼지는 절의 앞마당을 지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길 왼쪽으로는 오랜 세월 화두를 주고 받듯 앉아 있는 부도가 줄지어 있어 눈길을 끈다. 대비사에서 억산은 정남 방향이다. 직선거리 3km, 표고차 약 350m의 여유있는 공간과 거리지만 정상부의 바위는 보는 이를 짓누를 듯 위압적이다. 초입의 완만한 경사가 금세 끝나 버리고 갑자기 경사가 가팔라졌다. 억산의 동쪽 안부인 팔풍재까지는 지그재그로 계속 이어졌다. 팔풍재늘 지나서 억산 정상으로 향했다.
억산 정상부는 클라이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규모다. 짧은 곳은 40m, 동면의 긴 벽은 100m가 넘는다. 산 정상에 위치해 접근이 쉽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 상당히 매력적이다.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는 억산을 팔풍재에서 운문산 사이 봉우리로 표기하고 있다. 억산 정상에서 인재까지는 계속된 내리막이다. 등산로에서의 조망은 양호하고 운문산, 가지산, 천황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의 연봉들이 들락거리며 하늘금을 긋는다. 북쪽으로는 멀리 운문댐이 보이고 문복산, 용강산으로 이어지는 굵은 산줄기가 시야를 막아선다. 경북과 경남을 번갈아 감상하며 걷다보면 인재에 도착한다. 지도에는 소로만 표시되어 있지만 밀양 방향 1km쯤에 '엠마누엘성전' 이라는 기도원 건물이 서있고 인재 고갯마루에는 중계탑이 버티고 있다.
인재를 떠나 첫번째 바위봉우리에 올라서니 주변의 경관이 더욱 시원스럽게 다가왔다. 풍만한 선을 이루며 퍼져 나간 산릉을 보노라면, 정상에 바위봉우리를 얹고 있다 뿐 이 산이 전반적으로 여성스런 분위기의 산임을 보여준다. 봉의저수지 계곡은 억산에서 갈라진 지릉과 주능선 사이에 형성된 것이다. 이 계곡을 왼편으로 끼고 계속해 자그마한 바위지대를 통과해 구만산으로 향했다. 약 1시간 가량 걷고나니 구만산 자락에서 내리뻗은 능선의 안부에 오른다. 왼쪽의 구만산을 버리고 오른쪽의 돔형 봉우리로 올랐다. 산로가 희미해지며 야산처럼 특색없는 지형이 나타났다. 앞쪽 능선상의 봉우리를 향해 돌진했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은 듯 길흔적이 이어졌다 끊겼다 한다. 말굽 편자처럼 둥그렇게 휘어진 능선을 돌아갈 동안 마치 동네 야산 같은 분위기의 평이한 풍경이 나온다.
봉우리 하나를 넘자 넓은 공터가 나온다. 텐트 대여섯 동은 충분히 칠 수 있는 넓이였다. 계속해서 능선길을 타면 야산처럼 느껴지던 지역을 통과하자 육화산을 향해 양쪽으로 깊게 계곡이 패여 나간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경북은 장수골, 경남은 구만계곡이다. 능선의 시야가 트인 바위에 올라서자 여태껏과는 사뭇 다른 남성적인 경치가 펼쳐진다. 설악산 천불동의 축소판처럼 석양을 받아 빛나는 바위들이 계곡의 사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구만계곡쪽의 바위벽들이 돋보인다. 장수골은 끌로 깊게 파낸 것처럼 지계곡이 없이 미끈하게 일자로 뻗은 형상이 특이했다. 계곡 바닥은 하얀 바위들이 깔려 있어 눈부시다. 이 구간 능선은 비교적 오르내림이 심하다. 느긋하게 한참을 올랐다가 한순간에 뚝 떨어진다. 일몰 시각이 가다오며 육화산 뒤로 해가 넘어간다. 657m봉에서 구만약수 방면으로 하산하는 길을 만났다. 능선만 타고 가면 오치령이지만 길이 뚜렷한 경남 봉의리쪽으로 하산한다.
억산-인재-오치령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는 물을 구할 곳이 없다. 따라서 대비사에서 충분히 식수를준비해야 한다. 대비사에서 팔풍재까지는 1시간30분 거리. 지도상의 등고선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가파르다. 계곡도 짧아 흐르는 물을 보기는 쉽지 않다. 팔풍재는 능선 상의 사거리로 동쪽으로는 지형도에 '억산'으로 표기된 범봉(965.9m)을 통과해 운문산(1,196.4m)으로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대비골을 거쳐 석골사로 내려서는 등산로가 있다. 이 길은 경남쪽에서 억산으로 올라오는 길로 상운암계곡과 연결되어 있다. 팔풍재에서 억산 정상까지는 30분 거리로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왼쪽으로 우회한다. 지도상에 '깨진바위'로 표기된 정상에는 청도산악회에서 세운 정상표지석이 있다. 여기서 주능선처럼 보이는 문바위쪽 등산로를 따르면 조망이 뛰어 난 능선길로 봉위저수지 방향으로 내려서게 된다.
억산에서 인재까지는 계속된 내리막으로 길은 뚜렷하다. 정상에서 1시간30분 거리인 인재 고갯마루에는 중계탑이 보이고 비포장도로를 만난다. 이곳을 산행기점으로 끊어 남쪽의 봉의저수지 방향이나 북쪽의 임실로 내려설 수 있다. 인재에서 구만산까지는 경치 좋은 전망대 바위가 가끔씩 나타나는 능선길이다. 봉우리 두 개를 지나 능선이 평탄해지면 밀양쪽에서 올라오는 산길과 만난다. 이곳을 지난 잘록이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깨진 바위들이 널려 있는 완만한 봉우리를 지나 고만고만한 봉들이 이어진다. 여기서부터는 등산로가 희미해지며 야간 같은 기분이 든다.
비슷한 높이를 유지하며 말발굽처럼 휘어진 능선을 타고 돌아서 조그만 봉우리를 넘어서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인재에서 2시간30분 거리) 공터를 지나 오르내림이 심한 능선으로 이어지다가 657m봉 정상에서 뚜렷한 길을 버리고 우회전한다. 표지리본이 많이 달린 구만약수 방향으로 내려서면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이다. 이 지점을 지나면 길이 다시 희미해진다. 능선을 고집하고 계속 오르내리다 보면 소나무 세 그루가 멋지게 서 있는 오치령에 도착한다. 공터에서 오치령까지 2 시간30분에서 3시간 소요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