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걷기 좋은 길
(14) 망우리공원~아차산생태공원 근심 잊는 忘憂의 길… 망우천 물맛일랑 잊지마소서
13km 쉼없이 걸으면 3시간 'OK', 대중교통 연계쉬워 등산객 북적 애국지사 등 15인 기린 '연보비', 항일의병 '13도 창의군탑' 우뚝 중랑.광진구,구리시 풍광 매력, 삼국시대의 역사 이야기는 .덤'
▲ 평일인 지난 12일 망우리공원을 찾은 한 주민이 산책로 ‘사색의 길’ 윗부분 묘지들 사이로 나 있는 둘레길을 걷고 있다. 둘레길은 망우리공원-용마산-아차산으로 이어져 있다. 김낙중 기자 |
| ‘망우리’ 하면 ‘공동묘지’가 곧바로 떠오른다. ‘공동’이라는 접두사 때문인지 항상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드는 곳이다. 어떤 이들은 혐오감을 느낀다고도 한다. 물론 ‘망우리 공원’으로 개명을 한 지 오래다. 그래도 아직 대부분 사람들은 망우리 공동묘지로 부른다. 이런 곳이 인근 주민들은 물론 걷기 마니아들에게 훌륭한 ‘산책로’로 변신했다. 관할 구청인 서울 중랑구의 꾸준한 노력이 뒷받침됐다. 요즈음 ‘망우리공원’에는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주민들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색의 길’로 이름지어진 망우리공원의 5.2㎞ 산책로뿐만 아니라 용마산-아차산으로 이어지는 둘레길 코스 때문이다.
걷기만을 고집하거나 산책 정도만을 생각하고 집을 나선 사람은 공원묘지를 한 바퀴 도는 ‘사색의 길’을 걸으면 될 것이고, 운동량을 늘리고 싶은 사람은 망우산-용마산-아차산으로 이어지는 13여㎞의 ‘종주 걷기’를 할 수 있다.
망우리공원에서는 이곳에 묻힌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사상, 정치인들의 ‘연보비’를 둘러 보며 그 시대로 돌아가 보는 것도 좋다.
이어지는 용마산 - 아차산 걷기에서는 서울 중랑·광진구 그리고 경기 구리시 일대의 풍광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아차산을 걸으며 공부하는 삼국시대 역사 얘기는 덤이다.
코스가 뒤바뀌어도 상관없다. 어느 곳에서 시작하고 끝내도 대중교통과 연계가 쉽기 때문이다. 망우리공원에서 시작하려면 지하철 7호선 상봉역을 이용, 버스로 환승, 동부제일병원 앞 정류장에서 오른쪽 언덕을 오르면 서울시설공단 망우리공원 관리소를 만날 수 있다. 전철 중앙선 양원역을 통해서도 접근 가능하다. 물론 중랑구 망우본동 동부제일병원 정류장에 서는 시내버스는 많다.
아차산부터 코스를 잡을 경우에는 지하철 5호선 아차산역 2번 출구를 통해 아차산 생태공원-대성암-제3보루-제4보루-용마산 둘레길을 거쳐 망우리공원에 이르면 된다. 이 경우 쉼없이 걸으면 3시간여면 망우리공원관리사무소에 도착할 수 있다.
‘망우리공동묘지’로 널리 알려진 ‘망우리고개’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과 경기 구리시의 경계에 위치한 고개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사직의 기초를 닦은 후 무학대사에게 자신의 묏자리를 알아보게 하였다고 한다.
태조는 무학대사가 공을 들여 선정한 양주 검암산(儉岩山) 기슭, 즉 지금의 구리시 동구동의 동구릉 자리를 둘러보고 돌아가던 중에 이 고개에 이르러 자기가 묻힐 터를 굽어보면서 “이제야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겠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근심을 잊는 고개’라는 이름을 얻어 망우(忘憂)고개라 불렸다고 전한다. 하지만 왕릉터는 태조 사후에 잡은 것이라 지명 유래는 전설로만 여겨지고 있다.
‘숙종실록’에는 “태조께서 자손들이 뒤따라 장사지낼 곳이 20개소까지 많게 된다면 내가 이로부터 근심을 잊겠다고 하여 그곳의 가장 서쪽 한자락의 산봉우리를 이름하여 망우리라 하였고 그곳이 길지인 것을 알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곳에 공동묘지가 들어선 것은 1933년부터라고 한다. 이후 1973년까지 약 2만8500여기의 분묘가 조성되었다. 1973년 이후 ‘묘지이장’을 권고, 현재는 9900여기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곳에는 만해 한용운, 소파 방정환, 박인환 등 애국지사와 저명인사의 묘소가 있고, 공원 내 순환로를 따라 이분들의 얼을 기리기 위한 연보비가 설치되어 있다.
최근 조성된 5.2㎞의 산책로와 ‘연보비’는 민족과 역사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사색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밖에도 망우리공원에는 항일의병 ‘13도 창의군탑’과 약수터, 정자 등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최근에는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은행나무길’ ‘노을에 물든 청계천 물억새’와 함께 서울시설공단 선정 산책명소 3곳 중 하나로 뽑혔다. 망우리공원 내 용마천, 망우천, 송림천, 보현정사, 동산약수터는 서울시가 선정한 ‘가장 물맛 좋은 10곳’으로 꼽히기도 했다.
잠시 ‘사색의 길’가에 마련된 유명인사 15인의 연보비를 살펴 봤다.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장덕수 선생의 연보비에는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주지(主旨)를 선명하노라에서)”라고 씌어 있다.
시인 만해 한용운 연보비에는 “한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써 이 같은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 중에서)”라고 씌어 있다.
아동문학가이자 문화운동가인 소파 방정환의 연보비에는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 주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살펴 주십시오. 어린이에게 책을 늘 읽히십시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어린이날의 약속 중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아동 성폭력과 청소년 폭력이 횡행하는 요즈음 되새겨 들어야 할 문구다.
박광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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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기 아까운 코스 : 아차산성
아차산성… ‘온달장군이 전사한 곳’ 알려지며 유명 시내와 한강 한눈에 보이는 등산명소
| 아단성·장한성·광장성으로 불리기도 하는 아차산성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누가 축조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삼국시대 한강 일대를 빼앗기 위해 벌어진 치열한 전투의 승패에 따라 이 성의 주인이 백제에서 고구려, 신라 순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성이 축조된 아차산의 한자 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혼용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등 두 문자가 나타나며,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역사책인 고려사에는 ‘아차(峨嵯)’가 처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봉화산을 포함하여 망우리 공동묘지 지역과 용마봉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아차산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네이버 백과사전의 설명이다.
또 달리 전해지는 아차산의 유래는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당시 도성에 점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한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명종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쥐가 들어 있는 궤짝으로 능력을 시험했다고 한다.
그가 쥐의 숫자를 맞히지 못하자 명종은 사형을 명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금 후 궤짝에 있는 암쥐의 배를 갈라보니 새끼가 들어 있어서 ‘아차’ 하고 사형을 중지토록 했지만 이미 때가 늦어 홍계관은 죽었다. 이후 사형집행 장소의 위쪽 산을 아차산이라고 불렀다는 것.
아차산은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 추억되는 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평강공주’와의 사랑으로 고구려의 ‘용장’이 된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전투 중 이곳 아차산성에서 전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온달장군이 목을 축였다는 온달샘과 고구려의 ‘산성 안의 산성’인 ‘보루’의 흔적도 대부분 남아 있다.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던 까닭에 백제 초기부터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해 축조된 아차산성은 둘레의 길이가 약 1㎞, 평균 높이는 약 10m에 이른다. 험하지 않은 등산로를 오르면 서울시내와 멀리 성남의 남한산까지 조망할 수 있고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한 풍광을 즐길 수 있어 걷기와 산행 코스로 사랑받고 있다.
옛날 광진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며 바라보는 아차산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과 같아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다고도 한다. 아차산성 주변으로 배드민턴장, 씨름장, 팔각정 등 생태공원, 자생식물 관찰로 등이 조성돼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박광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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