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정보

100대산 - 황석산

박상규 2013. 4. 25. 09:22

100대 명산 -- 황석산

 

 

우전마을~황석산성남문~정상~거북바위~능선삼거리~용추계곡
푸른 산길 위에 붉은 마음 흐르리

 

글 곽영조 기자\사진 양계탁 기자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1597년 일본이 명나라에 요구한 무리한 화의조건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재침략을 감행한다. 이에 전주성 공략을 위해 진군하던 왜군이 합천의 초계와 합천읍을 지나 황석산성에 도착하고 안음현감이었던 곽준은 다가올 전란을 대비하던 중 육십령을 넘어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대치한다. 전 함양군수인 조종도와 무장출신인 김해부사 백사림, 인근 7개 현의 백성들이 가세해 7천여 명이 황석산성에서 8월 14일부터 함락되는 18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5일 동안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7천명 전원이 옥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황석산성전투다.
황석산성전투가 벌어진 황석산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해 남동쪽으로 이어진 산줄기에 위치한다. 월봉산을 거쳐 큰목재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며 기백산, 거망산, 황석산, 금원산을 빚어 놓았는데 가을이면 장관을 이루는 거망산 자락의 억새밭 구간을 통과해 마치 날이 선 듯한 날카로운 암봉으로 이뤄진 황석산을 비로소 만나게 된다.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킨 후 백제와 맞서면서 축조했다가 고려조에 잠시 폐쇄하기도 했었던 황석산성은 사면이 오르기 어려운 수십m의 절벽으로 이뤄진 천혜의 요새로 산성에 오를 수 있는 접근로는 남문과, 서문, 북문, 동문이 있었다.
가장 넓은 면적과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한 접근로는 서하면 봉전에서 우전마을로 올라가는 남문이다. 그 다음이 같은 지점에서 출발해 남문보다 더 계곡 위쪽에 위치한 서문으로 오르는 길이다. 북문과 동문은 경사도가 심하고 계곡이 좁아 등산로가 놓인 지금도 접근이 쉽지 않다. 이런 이점으로 황석산성전투 당시에 일반백성과 부녀자 등으로 구성된 7천명이 정예병인 왜군의 7만5천여 명과 맞닥트린 상황에서 수적 열세에 불구하고도 5일간을 고군분투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등산로도 이전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이 등산로 모두가 각 문으로 이어진다. 우전마을에서 출발한 등산로는 남문을 거쳐 정상으로 이어진다. 황석산청소년수련원에선 동문으로 오를 수 있다. 유동마을에서 시작하는 등산로는 깊은골샘터 지점에서 황석산청소년수련원에서 올라온 등산로와 합류해 동문으로 향한다.

 

 

남문에서 바라다 본 산성과 황석산 정상. 황석산성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과 돌을 섞어 쌓았는데 총거리 2750m에 달했다.

 

정유재란 당시 치열했던 황석산성전투가 벌어져


우전마을을 들머리로 삼아 황석산성 남문으로 이어지는 길로 산행을 시작했다. 26번 국도상에 있는 거연정휴게소 바로 왼쪽으로 난 도로에서 황석산을 바라보고 3km 정도 포장길을 오른다. 마을을 지나자 농업용수와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사방댐이 연이어 나온다. 우전마을에서 40여분 거리에 있는 두 번째 사방댐 부근에서 본격적인 등산로가 시작된다.
안내판이 설치된 초입부터 크고 작은 산돌이 넓게 너덜지대를 이룬다. 완만하게 이어진 구간을 20여분 오르자 매끈한 모습의 피바위가 나타난다.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적들의 칼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해 절벽으로 몸을 던져 순절했다는 곳으로 부녀자들의 피로 바위 벼랑 아래가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피바위 하단을 가로질러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 황석산성 남문에 도착했다. 황석산성은 돌로 쌓은 부분과 흙과 돌을 섞어 함께 쌓은 총거리 2750m에 달했던 포곡식 산성인데 포곡식이란 성곽에서 필수적인 수원확보를 위해 성벽을 축조할 때 계곡을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안내판 끝자락에 황석산성전투 당시 500여명이 순국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에 대해 최근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전투 중 옥쇄한 조선인의 수는 7천여명에 달했고,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왜군의 수도 2만 7천이 아닌 7만 5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박선호씨의 <황석산성전투와 임진대전쟁>에서 숫자가 왜곡된 것은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록한 자료가 없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었고, 일제 강점기에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은폐하기 위해 각종 자료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근거로 1914년 3월 1일에 조선총독부가 8도의 지방 관제를 개편하면서 안의군에 속한 현내, 황곡, 초점, 대대, 지대, 서상, 서하의 7개 면을 함양군에 병합시키며 안의군을 파군시킨 사실과 왜군의 기동로를 명기한 지도와 각종 사료를 통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황석산 남봉 정상. 정상석이 없어지고 터만 남았다. 가파른 암릉구간이 두세 사람이 서 있기 어려울 정도다.

 

 

남문에서 황석산 정상을 바라보고 오른쪽 성벽을 따라 이어지던 등산로가 샘터 갈림길에서 성벽과 떨어져 황석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남문으로 올라오는 가파른 구간과 달리 성 안쪽은 비교적 완만한 구간이다. 적은 양이긴 하나 계곡에 맑은 물도 흘렀다. 등산로는 식량을 비축해 두던 창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군창지 부근을 가로지른다. 부근에서 발견된 깨진 기와들이 길 한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깨진 기왓장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거망산방면의 갈림길에서 오른쪽 황석산 정상으로 오르는 마지막 구간이 가팔라 한 번에 오르기가 벅찰 정도다.

깎아지른 정상은 산성을 거쳐야만 오를 수 있어
거망산 갈림길에서 올라오면 산성 동문에 닿는다. 복원이 완료된 듯 깔끔한 모습의 성벽이 가파른 능선을 따라 이어졌다. 정상인 황석산 남봉은 동문에서 왼쪽에 솟은 암봉이라 정상을 가기 위해 로프가 설치된 암릉을 올라야 했다. 정상석이 없고 그 터만 남아있다. 거센 바람에 날렸는지 모를 일이지만 워낙 가파른 구간이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두세 사람이 서 있기도 좁은 정상이지만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함양군 일대와 대전통영간고속도로 건너편의 내숭산과 괘관산 등이 조망되고 맞은편에 남덕유에서 발원해 이어지는 거망산과 기백산, 금원산 등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날이 흐렸지만 멀리 백두대간 줄기인 덕유산자락과 지리산까지도 가물거린다. 거망산 방면의 북봉으로 가려면 깎아지른 절벽구간을 내려가야 한다. 가파른 구간이라서 겨울철이나 비가 올 경우에는 위험하므로 올라온 길을 내려가 우회하는게 좋다. 북봉 역시 암봉으로 이뤄졌으며 암릉길과 왼쪽 사면으로 우회길이 이어진다.
북봉을 내려서면 황석산성의 북문이다. 여느 곳과 다르게 북문은 문의 형태가 아닌 성벽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별도의 안내판도 없어 그냥 지나치기 쉽다.

 

 

황석산성 북문 전경. 여느 문과 다르게 통로가 없이 성벽형태로 복원되었다.

 

북문에서 능선을 따라 묘지를 지나고 통천문을 통과하면 거북바위에 올라선다. 거북바위에서 황석산의 진면목을 조망할 수 있다. 마치 날을 세운 칼이나 창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조총을 앞세운 채 밀려오는 수만의 왜군들 앞에서 오직 창과 활, 무기라 칭하기 어려운 낫과 괭이 그리고 투석전으로 맞서야 했던 이들의 그날의 드높던 의기를 닮은 듯 했다. 산성 복원은 능선구간으로 일부만 진행됐을 뿐 나머지 구간과 건물 복원은 예산 문제로 답보상태다. 거북바위 너머 빛바랜 안내판 아래로 산성을 쌓을 때 사용된 듯한 각진 돌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춘철 문화관광해설사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가며 이 강토를 지켰던 이름도 없이 스러진 이들을 위해서라도 잘못되고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내 바로 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이들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누가 나라를 위해 희생하겠습니까. 10배에 달하는 적과 맞서 정예병도 아닌 일반 백성들이 수천의 적을 궤멸시켰던 황석산성전투는 비록 패전으로 역사에 기록됐지만 그들은 결코 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금원산과 기백산이 코앞으로 보이는 거북바위 구간을 지나면 이내 거망산과 탁현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 거망산 방면 등산로는 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내리막 사면길이 20여분 이어진다. 능선을 올라 헬기장을 지나면 싸리나무와 억새 군락지를 통과한다. 도깨비 뿔 모양의 황석산을 조망한 후 능선상의 뫼재와 능선삼거리 구간 중 하나를 선택해 용추계곡으로 하산한다.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면 넉넉하다. ⓜ

 

 

용추계곡으로 내려가는 구간에 핀 진달래. 능선과 달리 계곡엔 봄 기운이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