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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비는 조용히 산을 지우고 있었다. 기백~금원~거망~황석산으로 이어지는 힘 좋은 산줄기를 지운 건 여린 안개비였다. 약함을 부인하지 않는 안개비는 있는 그대로의 약함으로 온 산을 뒤덮고 땅을 흠뻑 적셨다. 용추계곡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야영장은 초록색 신록 이불을 덮고 숙면 중이었다. 비 내리는 평일의 용추계곡은 아무도 없는 풍경이었지만, 아무도 없음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살고 싶어지게 했다.
도시의 집을 그대로 옮길 것 같은 기세의 커다란 오토캠핑용 텐트를 치기엔 턱없이 작은 나무데크는 낡디 낡아 시골 할매처럼 기울고 이가 빠져 있었다. 박달과 신갈 같은 활엽수들은 주위를 온통 초록으로 만들어 보고 있노라면 묘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정지 화면 같은 초록색 풍경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계곡의 물소리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와 닮아 있어 분위기를 한결 밝게 했다.
- ▲ 기백산에서 본 누룩덤과 금원산. 누룩을 쌓은 모양의 바위더미인 누룩덤은 금원~기백 산행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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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 나무, 흙이 뒤섞여 있는데 냄새는 초록색
차를 타고 올 때만 해도 ‘비 오는데 캠핑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막상 닿은 용추계곡은 사람을 매혹하는 낮은 어조의 힘이 있었다. 김시우(한국산악회 강원영서지부), 이윤희(탑클라이밍산악회)씨와 함께 텐트를 치고 짐을 풀자 이 숲의 유일한 오토캠퍼가 된 우리는 숲의 주인이 된 듯 의기양양해졌다.
텐트에 가만히 앉아 멍하니 숲을 응시한다. 경남 함양이 아니라 다른 세상 다른 시간에 온 것 같은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숲은 원시적이다. 도시생활의 날선 감성이 낯선 초록세상 속에서 서서히 무뎌진다. 눈을 감자 나뭇잎에 맺힌 빗물이 텐트에 떨어지는 소리, 조곤조곤 간지럽게 얘기하는 계곡 물소리, 바람이 가져다 주는 냄새가 증폭된다. 수풀냄새, 나무냄새, 흙냄새 같은 것이 뒤섞여 있는데 신기하게도 냄새가 초록색이다. 냄새를 맡는 동시에 초록이 연상되는 것이다. 편안한 기분이 드는 건, 피톤치드의 효과를 설명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고 반응하는 것일 터이다.
- ▲ 수망령에서 금원산으로 이어진 오름길. 물박달과 신갈나무가 빽빽한 산소탱크 같은 숲길이다.
- ▲ 누룩덤을 우회하는 길의 암릉구간. 고정로프가 있는 완만한 슬랩이라 쉽게 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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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화로에 숯을 피워 고기를 굽는다. 산행 중 비박과 야영만 하던 일행은 이렇게 몸이 편해도 되는 건지 어색하기만 하다. 비박산행에 비하면 궁궐에서 누리는 호사인 셈이다.
밤이 되자 순도 100%의 어둠이다. 거대한 바위벽처럼 단단한 어둠은 외딴 곳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배가시킨다. 도시와의 완전한 단절은 두려움과 동시에 묘한 쾌감을 안겨 준다.
아침이 되어도 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는 그쳤지만 금방이라도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질 듯한 날씨다. 산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우리가 보러 갈 수밖에. 수통에 물을 채우고 배낭을 싸고 산에 들 채비를 한다. 휴양림의 숲해설가인 서윤숙·김성애씨가 동행한다. 수망령을 들머리로 금원산과 기백산을 올라 도숫골로 하산하는 코스다.
수망령은 물을 바라보는 고개라는 뜻으로 함양 용추계곡과 거창 월성계곡을 가르는 고개다. 등산안내도 아래에는 쓰레기가 수북하다. 수망령에서 산행을 마치거나 식사를 한 등산객들이 버린 것일 게다. 우리나라에 등산 붐이 인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런 이들이 있다는 것이 슬프다.
산에 든다. 금원의 시작은 계단이다. 오르막의 연속이지만 호흡이 힘들지 않다. 완경사와 급경사가 적당히 섞여 있고 푹신한 흙길 때문이다. 흐린 날씨와 짙은 숲도 산을 오르기 쾌적한 여건이다. 눈길을 끄는 건 물박달나무다. 흰 껍질을 겹겹이 두른 낯선 모습으로 깊은 산 분위기를 자아낸다.
- ▲ 수망령에서 금원산으로 이어진 오름길. 산행 시작 후 처음 시야가 터지는 바위 전망대다.
- ▲ 용추계곡 트레킹. 비단처럼 흘러가는 계곡물은 누구라도 발을 담그고 싶게 한다.
- ▲ 용추계곡 상류는 아기자기하고 때 묻지 않은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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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원산과 기백산은 1,352.5m와 1,330.8m로 금원이 약간 더 높다. 거창과 함양의 경계로 알파벳 U를 거꾸로 뒤집은 모양의 산줄기 오른편에 있다. 발이 빠른 산꾼들은 왼쪽 산줄기인 거망산(1,184m)과 황석산(1,190m)까지 이어 타는 장거리종주를 하기도 한다. 금원산 이름은 원래 산이 검게 보인다 하여 검은산이라 불리던 것이 바뀌었다는 설과, 옛날 금으로 된 원숭이가 하도 날뛰어 한 도승이 이 산의 바위에 잡아 가두었다고 하여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원숭이를 가두었다는 ‘원암’이 금원산 깊숙이 있다.
순한 흙길 등산로에 문득 흰 바위가 있다. 바위에 올라서자 처음 산의 원경이 드러난다. 초록으로 가득한 산의 곡선이 거대한 스케일로 펼쳐진다. 초록바다의 거친 파도가 순간 멈춘 모습이다. 맞은편의 거망산과 황석산을 찾아보지만 구름이 삼켰다. 빠르게 흐르는 구름 사이로 뾰족한 바위산이 보인다. 월봉산(1,279m)이다. 눈 닿는 곳곳에 덩치 큰 명산이다.
전망바위에서 530m 더 오르자 금원산 정상. 철쭉 군락 가운데에 작은 바위가 솟은 곳이 정상이다. 환영한다는 듯 휘파람새가 운다. 5년 전에도 금원산 정상에서 휘파람새 소리를 듣고 감탄했는데 여전히 높고 맑은 울음으로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그러나 경치가 구름에 덮였고 귀찮게 하는 파리가 많아 바로 통과다.
테니스장만 한 헬기장을 지나면 다시 봉우리다. 금원산 동봉이다. 높이는 약간 낮지만 정상다운 맛은 몇 수 위다. 정상 암반이 훨씬 크고 파노라마로 뚫려 있어 눈이 확 트이는 시원함이 있다.
안부로 내려선다. 흘러가는 구름 사이로 기와지붕이 눈에 띈다. 신선도에 나올 법한 팔각정에서 한 숨 돌린다. 견고하게 지은 기와지붕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신갈나무와 산죽이 빽빽한 능선 길을 따라가자 문득 콘크리트 임도가 나온다. 수망령 언저리에서 올라온 길로 이곳이 임도 종점이다. 벤치가 있어 덕분에 목을 축이고 간다.